깜장 고무신
박 해 순
며칠 전 대전의 옛 민속박물관에 들어갔더니 깜장고무신이 눈에 띄었다. 깜장고무신! 고무신 세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너도 나도 고무신을 싣고 다녔으니 어릴 적 추억 한 두 가지 꺼내놓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도 그 추억들을 하나둘 꺼내본다.
내가 살던 고향에서는 중학교에나 가야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애들도 거의 검정고무신이었고 가끔가다 좀 살만하다는 집 여자 애들이 꽃무늬가 그려진 색동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어르신들은 하얀 고무신을 신었고 엄마들은 코가 뾰족한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고무신 생김새가 엇비슷해 바꿔 신기 일쑤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초상집에 가는 날에는 잊어버리는 일도 허다했다. 지질히도 어려웠던 그 때 그 시절 난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 깜장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고무신은 꼬맹이들에게는 신나는 장난감이었고 냇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을 땐 어항이기도 했다. 여름에는 발에 땀이 차 신발 속에서 삑삑 방귀뀌는 소리가 나서 웃음거리였고 곧잘 벗겨져 애를 먹었다. 그럴 땐 신발 안에 짚을 넣기도 했고 짚이나 새끼줄로 고무신을 칭칭 감아서 신고 다녀야 했다.
고무신이 여간 질기지가 않았다. 잘 닳지도 않아 아이들 발이 커지다보니 발이 아플 만큼 작은 신발을 신고 다녀야했고 신발을 아예 벗고 다니는 애들도 있었다. 짓궂은 아이들은 새 고무신을 신으려고 일부러 찢기도 하고 잊어버렸다며 거짓말도 했다. 영원히 신을 것 같은 고무신도 닳게되어 돌부리를 밟으면 발바닥이 아프고 밑바닥에 물이 새어 들어오는 날에는 제 아무리 고쳐 신어도 새 고무신을 살 시기가 된 것이었다. 고무신을 더 이상 못 신게 되면 이를 잘 모아두었다가 가끔 찾아오는 엿장수한테 엿으로 바꿔먹기도 했다.
이렇게나 많은 고무신 추억 속에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도 내 기억에 잊혀 지지 않고 또렷이 기억이 남아있는 것이 있다. 여덟살 꼬마의 무단결석한 유일한 날이기에 그렇다.
조치원 장날 아버지께서 '타이어'표 검정 고무신을 사오시던 날 밤 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내일 학교에 가서 새 고무신을 자랑할 생각을 하니 잠이 제대로 오지않았다. 그 다음날 아침 새 신을 신고 학교까지 단숨에 달려가고 싶었는데 부모님께서 새 신을 다락에 넣어두시고 못 신고 가게 하신다. 새 신발이 발에 딱 맞여 앞으로 이삼년 이상 신어야 하니 다음 장날 더 큰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울며불며 애원해 보았지만 한사코 신발을 내주지 않고 신고 있던 낡은 신을 신고 학교만 빨리 가라 신다.
골이 난 꼬마는 신발을 훔쳐 집밖으로 내달리려 순간 아버지한테 들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여덟살 꼬마가 달려 보았자 별 수 있나 하는 수 없이 논으로 뛰어들었다. 마침 논은 모내기를 하려고 쓰려놓아 한강 물처럼 불어나 꼬마 배꼽까지 물이 차올랐다. 온 동네 아이들이 학교가는 길에 아버지는 논 한 가운데까지 좇아 오지는 않으셨다. 난 논 속에서 내내 울면서 억지를 부렸다. 새 신을 신게 해달라고.
아버지는 창피하셨는지 집으로 들어가시고 난 서둘러 학교로 달려가 보았지만 벌써 1교시 수업을 시작했는지 교실마다 글 읽는 소리만 들린다. 우리 반 교실 창 밖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면서 누가라도 "○○이, 학교 지금 왔어요."고 불러주길 바랬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결국 배짱 없던 나로선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십여리쯤 되었는데 산 고갯길을 두 개를 넘어야 했고 다 자란 노란 호밀 밭을 지날 땐 문둥이가 숨어 있다가 내 간을 빼먹으려고 금방이라도 달려 나올 것 같았다. 꼬마는 무서워서 울고 학교 못 가 울고 눈물이 뒤범벅되어 밭과 고갯길을 넘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장작골 밭에서 엄마가 마침 비가 온 후라 고구마를 심고 계셨다. 엄마는 눈물로 찌들은 아들의 얼굴을 보고 안됐는지 학교에 다시 가라는 말씀은 안 하시고 고구마 줄기를 엄마 손에다 하나씩 놓아 달랬다. "엄마, 다음 장날 이 신발 바꿔오면 안될까?" "이젠 안 되지. 고무신 바닥이 조금이라도 닳았는데 누가 바꾸어 주겠니?"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고무신 안준다고 학교에 결석했냐며 가르침대로 까까중 한 내 머리를 내려치셨다. 맞은 자국이 얼마 안 있어 벌겋게 밤알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그게 신기한 지 부푼 곳을 이리 저리 만져보며 꾹꾹 눌러보는데 아프기도 하지만 친구들 놀림이 더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그리고 5년 후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난 6년 정근상 밖에 받지 못했다.
요즘도 이 고무신을 전통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얼마 전 인근 시장에 갔더니 고무신을 민속화란 이름으로 신발가게에 팔고 있었다. 그 신발을 사다가 신발 앞부분에 꽃을 그려 넣었더니 참 예뻤다. 어찌 꽃이 있어 예뻤으랴! 그 속에 담긴 추억이 더 예뻤겠지. 친구들과의 모임에 이 신발을 신고 갔더니 한 친구가 내게 농담을 건넨다. “와! 조선 나이키 신고 다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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