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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山樂水/제주도

황사영 아들의 묘가 추자도에 있네요

by 박카쓰 2016. 3. 14.

이번 추자도 여행을 하며 참으로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접합니다.

 

황경한의 묘? 황경한은 누구?? 황경한은 백서사건으로 참사를 당한 황사영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가 어찌하여 여기에 누워있을까?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2살된 아들 황경한이 유배 당한 추자도


추자도는 제주시 북부 해상에 산재한 군도로 이루어진 섬이다. 이 섬은 이웃한 제주도, 보길도와 함께 유배지로 이용되어 왔다. 지금은 2,800여 주민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이곳 하추자도 예초리 산중턱에 먼 바다를 바라보며 누워 있는 묘 하나가 바로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黃景漢, 보명 敬憲, 1800~ ?)의 묘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은 1775년 유명한 남인 가문에서 태어나 16세때 진사시에 합격할 만큼 영특하였다. 그러나 1790년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후 세속적 명리를 버리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충북 배론에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를 써 북경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1751~1808, 알렉산델)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체포되고,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처형되었으며,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丁蘭珠, 命連,1773~1838, 마리아)는 제주 관비로, 그리고 2살 된 아들은 이곳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정난주는 1773년 유명한 남인이요 신자 가문인 나주 정씨 정약현(丁若鉉,1758~1816)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세 때인 1790년16세인 황사영과 혼인하고 1800년 아들 경한을 나았다. 1801년 2살의 아들을 가슴에 안고 귀양길에 오른 정난주는 추자도에 이르러 아들이 평생 죄인으로 살아가야 함을 걱정하여 젖내 나는 어린 것을 예초리 바닷가 갯바위에 내려놓고, 사공들에게는 죽어서 수장했다고 말한다.


갯바위에 놓여진 황경한은 그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온 어부 오씨에 의해 키워졌으며, 성장한 뒤에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현재 예초리에는 황경한의 6대 손부와 7대손 황인수씨 내외가 살고 있다. 그리고 추자도에서는 황씨와 오씨가 결혼하지 아니하는 풍습도 생겨났다. 갯바위에서 울던 두 살 아기는 이곳에 묻혀 있다. 황경한의 묘소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바다로 돌출한 바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바로 이 갯바위가두 살 된 황경한이 놓여져 울고 있던 바위다.


또한 《일성록》과 《사학징의》에는 경한이 추자도에 오게 된 것은 ‘나이가 2세 이하로 어려 법에 따라 교수시키지 않고 영광군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시킨다.’는 판결문에 따른 것임을 말한다.


이곳 내려오는 이야기로 황경한이 살던 집은 불타 없어졌고 그 집안에서 간직해온 젖먹이 때 옷이나 가첩 등이 그때 소실돼 안타깝다고 전해진다. 집터 자리는 현재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황경한의 어머니 정난주도 참으로 기구한 한평생을 보냈다. 아버지 정약현, 정약전, 정약용...참으로 대단한 가문이다.

 

 

1박2일 추자도를 돌아보며 의외로 창녕황씨 묘소가 곳곳에 있었다. 이 모두가 황경한의 자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