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3, 문의, 하프코스 1시간 47분!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지도 족히 스무 번도 넘었을 터인데 대회 때마다 잠을 제대로 들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밤새 잠을 뒤척이며 어젯밤 꽤 불던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새벽녘 창밖을 보니 인근 야산의 어두운 그림자와 먼동이 만들어 내는 절묘한 색의 조화가 오늘 날씨가 최적임을 알 수 있었다.
아침으로 간단한 요기를 하고 대회에 함께 참가하기로 한 우리학교 원어민 영어선생님 Aaron Hess을 만나러 충북고 정문으로 갔다. 우리한국에 온지 석 달 정도 되었는데 우리문화에 쉽게 익숙해지며 아이들과 호흡을 맞추며 수업을 곧잘 한다. 마라톤 경험으론 10Km를 55분에 달린 것이 고작이고 매일 태권도를 연습한다고는 하지만 오늘 하프코스에 처음 출전하는 터라 내심 걱정이 되었다.
문의 대청댐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풍요로운 가을 그 자체였다. 맑디맑은 높은 가을 하늘, 길 양쪽 하늘하늘 거리는 코스모스,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들판, 게다가 오늘 대회와 며칠 후 우리고장 청주에서 펼쳐지는 전국체전을 앞두고 잘 다듬어지고 깨끗해진 주변이 우리의 마음을 풍족하게 하고도 남았다.
문의 잔디 운동장엔 대회를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마라톤 동호인들,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얼굴마다 화색이 완연하고 들뜬 표정으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고 하늘에는 행글라이더가 떠돌며 오늘 행사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이윽고 주최 측에서 마련한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하늘에서 헬리콥터가 쌀 봉지를 매달은 낙하산을 수백 개 투하하는데 그 선물을 타려 이리저리 몰리며 뛰어 다니는데 최고 미질의 내고장 청원생명쌀 홍보도 좋지만 위험천만이었다.
이런저런 식전행사를 마치고 풀코스부터 마라톤이 시작되는데 9시 45분! 하프코스가 출발하였다. 오늘 대회의 목표는 1시간 50분 이내 진입이다. 이 미국청년도 처음 뛰는 하프코스인지라 보조를 맞추며 뛰어야 하고 나도 지난여름 영동대회 악몽이 떠올라 그 정도면 만족할 만한 기록이라고 본다. 이 청년도 나와 보조를 맞추며 뛸 것이고 마지막 힘들 땐 매달리면서라도 완주하겠다는 의지를 보낸다.
마라토너로 밀집한 초반레이스를 헤치고 나오며 5분 조금 넘는 안정된 페이스로 괴곡리 삼거리를 지나 최대난관인 피미고개를 넘는데 이 청년, 좀 오버하는 듯 빨리 올라간다. 그래도 내가 마라톤 선배라고 몇 마디 일러준다. “올라갈 적엔 보폭을 좁게 잔걸음으로, 내려갈 적엔 보폭을 크게 하고 발을 힘차게 구르지 말고 지면에서 많이 띄지 말라.” 청남대입구로 들어서며 이 청년도 대청호의 수려한 경관에 새삼 놀란다.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수 길을 달릴 땐 정말이지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코스를 없을 것이라고 내 고장 자랑을 늘어놓았다.
반환점을 53분에 돌았다. 이 청년 다소 힘에 부치는지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지나치는 마라토너들과 자원봉사자들로부터 이 훤칠하고 이색적인 마스크의 이국청년에게 많은 격려를 받고 있으니 힘이 솟아나겠지. 덩달아 나도 힘이 솟고...피미고개를 힘들게 넘으면서 이제는 자신감을 회복하는 모양이다. 괴곡리를 지나 상항리로 돌아가는 길에서 자연의 고마움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또 한번 느껴본다. 가을바람에 흐느적거리는 억새풀, 길 양쪽 만발해 있는 수많은 들꽃들, 거기에 고통을 참아가며 최선을 다하는 달림이 들, 과연 장관이로다.
1Km를 남기고는 그 친구, 내게 “5분여!”하고 말하며 먼저 스퍼트한다. ‘어라! 그러면 지금까지 날 배려해 주었단 말인가!’ 그래도 함께 골인해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아도 저 만치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1시간 47-8분대! 그 친구, 가장 긴 코스를 난생 처음 달렸다고 마냥 즐거워하고 나도 코스 내내 그 청년과 보조를 맞추며 잘 뛴 셈이로다.
오늘 내 고장에서 열린 마라톤대회에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각종 행사와 먹거리, 그리고 내가 속한 청주 마라톤회에서 베풀어준 온정은 이 이국청년에게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는지 돌아오며 내내 정말로 뜻 깊은 한나절을 보냈다고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저녁때쯤 서울 사는 막내 동생한테서 전화가 온다. “형, 괜찮아?” “왜?” “오늘 그 대회 나간 것 아니야?” 저녁뉴스를 들으며 오늘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두 분이 안타깝게도 운명을 달리하셨다. ‘그래, 누구한테 어떤 불의의 사고가 날지 아무도 모른다. 평소 준비운동을 철저히 하고 이제 나이가 오십 줄이면 빨리 달리는 욕심은 절대로 내지말자. 그리고 살아 숨쉬고 있을 때 남에게 친절하고 겸손하며 한 가지 라도 착한 일하며 살아가보자’고 다짐해본다.
황새걸음 좇아가려니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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