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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時習/역사저널

과감한 현실론으로 나라를 살리다 - 최명길

by 박카쓰 2024. 9. 12.

인조에게 삼전도 굴욕을 안긴 최명길은 충신일까, 역적일까?
조선의 신하 최명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되고있다.


과감한 현실론으로 나라를 살리다
지천(遲川), 崔鳴吉

 

 

나라가 전란으로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중요한 것은 명분인가 실리인가? 임진왜란 이후 최대 전란인 병자호란을 맞아 ‘주화(主和)’라는 과감한 현실론으로 나라를 살린 재상이 있으니 그가 바로 최명길(崔鳴吉)이다.

 

최명길의 활약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 것은 청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였다.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존명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척화(斥和)가 우세했다. 그럼에도 최명길은 싸울 힘이 없을 때는 국토를 보존하고 왕을 지키며 백성이 어육이 되는 것을 막는 것이 우선이며, 그 길은 주화뿐임을 내세워 청과 담판을 짓고 전쟁을 매듭지었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 왕을 지킨 재상

최명길은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을 거쳐 1611년(광해군 3)에 공조 좌랑이 되고 다음 해 병조 좌랑이 되었으나 병조 좌랑으로 공관에 머물다 폐모론(廢母論)의 기밀과 얽혀 파직당했다. 이후 가평으로 내려간 그는 조익(趙翼), 장유(張維), 이시백(李時白) 등과 교유하며 남언경(南彦經)의 아들 남격(南格)에게 양명학을 배웠다.

 

학문을 연구하며 재야에 묻혀 있던 최명길에게 마침내 입신의 기회가 온 것은 인조반정 때였다. 반정은 신경희(申景禧)가 능양군(綾陽君, 훗날 인조)의 동생 능창군을 추대하려다가 장살된 사건을 계기로 능양군의 인척인 신경진(申景禛), 신경유(申景裕), 신경인(申景禋) 등 평산 신씨와 구굉(具宏), 구인후(具仁垕), 구인기(具仁墍) 등 능성 구씨의 무인 세력이 주도하면서 계획되었다. 신경진과 구굉은 먼저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무신 이서(李曙)와 체찰부사 장만(張晩)을 설득하고 김류, 이귀, 이귀의 아들 이시백, 이시방(李時昉), 최명길, 김자점(金自點) 등 문인 세력을 포섭한 다음 훈련대장 이홍립(李弘立)을 끌어들였다.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사건은 반정의 속도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최명길은 이때 시일을 오래 끌면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점을 쳐서 거사일을 정했다. 그리고 1623년 3월 12일, 한밤중에 반정군을 움직여 창의문을 거쳐 창덕궁으로 밀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켰다. 광해군은 사다리를 타고 궁성을 넘어가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어 있다가 잡혀 왔다. 능양군은 3월 13일에 인목대비를 복위시키고 인목대비의 명으로 경운궁에서 즉위했다.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되었으며, 이이첨 등을 처형함으로써 반정을 마무리했다. 최명길은 반정을 성공시킨 공으로 1등공신에 올라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이조 좌랑이 되어 본격적인 관직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집권체제를 안정시키고 반정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인조는 즉위교서에서 반정의 명분이 광해군의 패륜과 대명의리(代明義理)의 위배에 있음을 천명했다. 그리고 광해군 시절의 관료들을 대거 숙청하고 김장생(金長生), 박지계(朴知誡), 장현광(張顯光),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의 사림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김류와 이귀 다음으로 인조의 신임을 받은 최명길은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반정 1년 만에 이조 참판으로 승진하면서 승승장구했다.

 

최명길은 자신이 세운 왕을 보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그러했다. 이괄은 반정 당시 군사를 지휘해 큰 공을 세웠음에도 2등공신으로 낮춰진데다 평안 병사에 배치되자 불만을 터뜨리고 난을 일으켰다. 다급한 상황에 몰려 인조는 공주로 몽진했다. 최명길은 백면서생의 몸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난을 진압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서울까지 올라온 이괄은 결국 관군에게 패하고 목이 잘렸다.

 

한편 인조의 생모인 계운궁(啓運宮)이 사망했을 때 인조의 상복을 어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쟁이 일었다. 영의정 이원익 등은 인조가 대통을 이었으니 친부모에 대해서는 상복을 강복해 부장기(不杖期, 한 해 동안 지팡이는 짚지 않고 상복만 입는 것)로 정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반면 최명길은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조가 조통(祖統)을 이어받았고 방계가 없으니 부모라는 명칭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인조가 자신의 부친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숭논의(追崇論議)를 일으키자, 여러 신료들이 반발하고 나선 데 반해 최명길은 “추숭한 나라는 망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무시한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면서 다시 인조를 위해 나섰다.

 

대의에는 어긋날지 모르나 임금의 입장이 중요하다는 것이 최명길의 생각이었다. 대신들이 최명길을 힐난했지만 인조는 최명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계운궁의 복상으로는 장유(張維)의 견해에 따라 삼년복도 부장기도 아닌 장기복(杖期服, 한 해 동안 지팡이를 짚고 상복을 입는 것)을 입게 되었다.

 

나라를 위한 결단, 주화론

1627년(인조 5) 정월 17일에 후금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왔다. 조정과 온 백성이 술렁이며 두려워 떨고 있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이 대명의리로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후금군이 평양에 이르러 화의를 청했다. 최명길과 이귀는 적의 기세가 강성하니 부드러운 말로 그들의 예봉을 피하고 화의를 맺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을 갔다. 왕이 강화에 있을 때 후금의 사신이 와서 다시 화의를 청했다. 그리하여 후금군도 형제의 맹약을 맺고 물러갔다. 그러자 대간이 최명길을 공격했다.

완성군(完城君) 최명길이 군국(軍國)의 정사를 마음대로 천단해 나라를 그르치고 일을 낭패시킨 죄가 한둘이 아닙니다. 서울을 떠나는 계책을 일찍 정한 것과 임진강을 지킬 것이 없다는 의논도 이를 시종 주장한 사람은 명길입니다. 자기의 견해를 실행하기 위해 공의를 억제함으로써 국사를 이렇게 막바지에 이르게 만들었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에 이르러서도 또 화의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 이에 교활한 오랑캐를 믿을 만하다 하고 항복한 장수를 충절이라 하는가 하면 온 나라의 힘을 다 기울여 끝없는 욕심을 채워 주고 천승(千乘)의 존엄함을 굽혀 견양(犬羊)의 무리를 친히 접견하게 하였으니, 이는 다 명길이 한 짓입니다. 무릇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속히 찬출하도록 명하여 대중들의 분노를 통쾌하게 해 주소서.
《인조실록》 권15, 인조 5년 2월 13일

그러나 인조는 이 상소에 대해 이렇게 응수했다.

“국사를 의논해 결정하는 것은 묘당의 책임인데 그대들은 명길에게 죄를 돌리니 그 뜻을 모르겠다. 조금도 죄줄 만한 일이 없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말라.”

그리고 이를 듣지 않았다.

그런데 1636년(인조 14) 봄,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조선에 다시 사신을 보내왔다. 조선으로 하여금 청에 대해 군신의 예를 다하라는 것이 사신의 요구였다. 조정은 발칵 뒤집어졌고 다시 척화파와 주화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대신들은 사신을 죽이는 것으로 조선의 뜻을 보여 주어야 한다며 흥분했다. 하지만 최명길의 생각은 달랐다.

“전하, 정묘호란 이후 종묘사직과 국토가 10년을 평화롭게 지탱해온 것은 모두 화의의 덕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후금의 군주를 ‘청국한(淸國汗)’이라 불러야 하고 후금의 사신을 불러들여 만나 보아야 하며, 만일 박대를 하면 훗날 후회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시독관 조빈(趙贇)은 호란 이후에 조선이 강하지 못한 것은 화의 때문이라며 반대되는 주장을 폈다. 오달제(吳達濟) 등 젊은 언관들도 최명길의 화의를 일제히 비판했다. 거기에다 부교리 윤집(尹集)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려 화의를 반대했다. 이 상소는 척화의 명분을 잘 보여 준다.

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옛날부터 그러했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명나라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나라이고 노적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자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임진년의 일은 조그마한 것까지도 모두 황제의 힘이니 우리나라가 살아서 숨 쉬는 한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오랑캐의 형세가 크게 확장되어 경사(京師)를 핍박하고 황릉(皇陵)을 더럽혔는데,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전하께서는 이때에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상 구차스럽게 생명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력이 미약해 모두 출병시켜 정벌에 나가지 못했지만, 또한 어찌 차마 이런 시기에 다시 화의를 제창할 수야 있겠습니까.
《인조실록》 권33, 인조 14년 11월 8일

 

철저한 존명사대주의였다. 자국을 위한 척화가 아니라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를 위한 복수가 목표였다. 이것이 사림이 고수한 대외의식의 핵심이었다. 게다가 척화를 소리 높여 외치며 최명길을 비난하기만 했지 군비를 정비하거나 냉정하게 그 후의 일을 도모하는 자가 없었다.

조정에서 대책 없이 화의론을 배척하며 우왕좌왕하는 사이 청에서 보낸 최후통첩 시한이 지났다. 조선은 다시 한 번 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홀로 적진에 들어가 담판을 짓다

1636년 12월 13일 마침내 병자호란이 터졌다. 조정은 강화도로 피란을 준비했지만 호위병들이 다 달아나고, 다음 날 적이 양철평(지금의 은평구 녹번동)까지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최명길이 인조 앞에 나서서 말했다.

“신이 홀로 적장을 마중해 그들이 약속을 어긴 것을 꾸짖겠습니다. 저들의 뜻이 만약 좋게 하자는 데가 없고 그 사나움을 피할 수 없으면 신은 그 칼 아래 죽으려니와 만약에 신을 거절하지 아니하고 주객으로 상대하게 되면 오고 가고 실랑이하며 주저하는 사이에 틈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니, 서울에서 가깝고 견고한 남한산성으로 입성하시어 형편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소서.”

인조는 “그대 홀로 목숨을 걸고 범의 입으로 들어가 임금의 급함을 구하려 하니 가상하다.”고 말하며 최명길의 뜻에 따랐다.

최명길은 청군의 진영에 가서 적장에게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물었다. 적장은 화친을 할지 싸울지를 빨리 결정하라고 했다. 최명길이 중언부언하며 일부러 시간을 끄는 사이 해가 저물었고 그사이 인조는 무사히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화가 난 청군은 최명길을 죽이려 했지만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사신을 죽일 수는 없다고 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구했다. 처음에 인조는 이를 거절했지만, 날이 점점 추워지고 성이 고립되어 가자 대신들 사이에서 화의를 하자는 의견이 점점 많아졌다. 인조는 최명길로 하여금 청에 보내는 국서를 쓰게 했다. 조선은 정묘화약 이후 10년 동안 우의를 지켜왔고, 청에 대해 화살을 겨눈 적이 없으며, 전년에 있었던 몇몇 잘못은 소통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니 용서해 주면 화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청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최명길은 다시 국서를 썼다. “임진년에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난리를 구원했다. 지금 만약 군사를 거두어 나라를 보존토록 해 준다면 그 은혜가 (그때와) 다름이 없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최명길이 한참 국서를 교정하고 있는데,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 통곡하며 찢어 버렸다.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君臣)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예부터 군사가 성 밑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가 없습니다!”

인조와 대신들이 김상헌의 말에 숙연한 가운데 최명길은 찢어진 종이를 조용히 주워 붙였다.

“국서를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고, 또한 국서를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는 법이지요.”

최명길은 모두가 어쩔 수 없으면서도 꺼리는 일을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묵묵히 해냈다. 인조는 끝내 삼전도에서 청의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당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다. 그로 인해 조선은 국토와 왕조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 최명길

인조가 청에 항복한 이후, 국토는 보존되고 왕의 지위는 이어졌지만 왕세자와 윤집, 오달제 등 조신들이 인질로 끌려가고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포로로 적지에 억류되는 참상을 빚게 되었다. 많은 조정 신료들은 다른 방도가 없었음에도 화의에 앞장선 최명길을 비난했다. 심지어 전 참봉 심광수(沈光洙)는 최명길을 참수할 것까지 주장했다.

그런데 최명길이 그토록 화의를 고수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명분을 지키려다 왕과 백성이 도륙을 당하고 국토가 피폐해지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나라를 지켜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최명길이 동생 최혜길(崔惠吉)에게 보낸 편지에 이러한 뜻이 담겨 있다.

신종(神宗)이 임진왜란 때 끼친 유택(遺澤)을 비록 잊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또한 태조께서 창업하신 신령스러운 이 터전 역시 차마 망하게 할 수는 없는 것, 이것이 큰 의리이다. 그리고 해동 사람이라면 이미 동국의 신민인즉 우리 임금을 위해 우리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명나라를 위해 우리 임금에게 권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최명길, 《지천선생유집(遲川先生遺集)》 권23 〈답중제참판혜길서(答仲第參判惠吉書)〉

국가 존폐의 위기를 맞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편이 화의였다는 것이니, 최명길이야말로 위기 관리에 능숙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청에 항복한 이후 적극적으로 정치 개혁을 펼쳐 나간 것으로도 확인되는 바이다.

인조가 청에 항복한 후 신료들은 잇달아 휴가를 청하면서 벼슬을 하려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인조는 이에 다음과 같이 명했다.

“평소에 직위에 있다가 변란이 발생하면 버리고 떠나는 것이 어찌 사리이겠는가? 그러나 국가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버리고 떠나는 사람을 하필 굳이 청해 머물게 할 것이 있겠는가? 새 인물로 교체하도록 하라!”

1637년(인조 15) 우의정이 된 최명길은 전후의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혼신을 다했다. 그는 의정부서사제를 부활시키고, 인사권을 대신이 갖도록 하기 위해 낭천제(郎薦制)를 혁파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피폐한 농촌을 구제하며 백성에게 거두는 세금을 줄일 것, 호란 당시 도망친 군사들을 사면할 것, 전몰장사(戰歿將士)에게 포상할 것, 척화신에게 관용을 베풀 것 등을 건의했다.

같은 해 청나라에서 명을 치는 데 원병을 보내라고 하자 최명길이 사은사로 나서 “병화를 당하여 백성들이 피폐한데다가 가축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아 원병을 보낼 수 없다. 더욱이 조선은 명을 300년 동안 받들었으니 섬기던 나라를 치는 군병을 내기 어렵다.”며 황제를 설득해 파병을 면했다. 영의정이 된 1642년(인조 20)에도 최명길은 목숨을 걸고 청나라에 가서 징집 명령을 철회시키니, 이는 조선을 구한 것이요, 결과적으로 명에 대한 의리도 지킨 것이 되었다.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

최명길은 1642년 명나라와 밀통한다는 밀고를 당해 이조 판서 이현영(李顯英), 예조 참판 이식(李植) 등과 함께 청나라에 소환되었다. 그리고 사형수의 형옥인 북관에 투옥되었다. 이때 김상헌도 삼전도비를 부쉈다는 죄목으로 심양으로 끌려가 최명길과 같은 감옥의 동관에 투옥되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4년여를 보내는 동안 시를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진정 의리 있는 선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김상헌은 최명길이 청나라의 감옥에서 끝내 굴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충정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1644년(인조 22) 청나라가 북경을 함락하자, 이듬해 세자와 봉림대군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는데 이때 최명길과 김상헌도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다. 인조는 최명길이 돌아오자 직첩을 돌려주고 완성부원군(完成府院君)에 임명했다. 최명길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과감한 제도 개혁을 주장하고 적극 나섰으나, 곧 중한 병을 얻어 타계했다. 최명길과 오랜 고락을 함께 해 온 인조는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며 5일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3일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최 상(崔相)은 재주가 뛰어나고 진심으로 국사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 이제 어디에서 최 완성(崔完成) 같은 사람을 구할 수 있으랴.”

실록의 졸기에는 최명길을 이렇게 평한다.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는데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일찍부터 세상일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광해군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를 협찬했는데, 공이 많아 드디어 정사원훈에 녹훈되었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차서를 뛰어넘어 경상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추숭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산성 변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해 보냄으로써 사감을 풀었고 환도 후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해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피하지 않고 앞장섰으며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해 따를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인조실록》 권48, 인조 25년 5월 17일

 

일반 사류인 사관이 쓴 사론(史論)이기 때문에 다소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그의 구국 의지와 재상으로서의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명길은 후에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명분론이 득세해 높이 평가받지 못하고 그 자손들도 번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명길의 노력으로 국가가 보존되지 않았다면 명분론이 설 자리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척화론 역시 국가를 위한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 해도 정세를 바로 보고 현실을 받아들여 실리를 택한 최명길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재평가해야 할 필요는 있다.

글...
이성무 1937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를 거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