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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時習/역사저널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의 우정!

by 박카쓰 2024. 3. 19.

해남 두륜산을 다녀오며 초의선사가 40년간 머물렀다는 일지암에 들렸다. 차의 성지 일지암, 차의 다성으로 불리우는 초의선사가 1824년에 세운 암자이다.

 

"뱁새는 언제나 한마음이기때문에 나무끝 한가지에 살아도 편안하다" 에서 일지를 따와 일지암이라 불렀다. 

그의 허욕을 버린 유유자적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자우혼련사(자우산방)는 초의선사의 살림채로, 연못에 4개의 돌기둥을 쌓아 남든 누마루 건물이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같은 당대의 대학자들과 교류하였으며, 끊어져 가던 우리의 차문화를 일으켜 세웠다. 

 

초의선사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조선 정조10년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는 순조때 남평 운흥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이후 조선 팔도의 선지식을 찾아 공부를 하다가 명성이 높아지자 두륜산 자락에 일지암-枝庵을 짓고 은거했다.

 

시·서·화·차는 물론 유학·실학·탱화·단청·범패 · 사찰음식 · 단방에까지 조예가 깊은 기재였다. '한국의 다경茶經'으로 부르는 『동다송東茶頌』을 쓴 다성茶聖이기도 하다. 강진의 유배객 정약용, 불멸의 예술혼 김정희와 나눈 삼각 교제는 후세에 이르도록 전설로 회자한다.

 

저작으로는 '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초의선과禪등이 있다. 대흥사의 13대 종사로 대흥사에 관련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우정...

 

추사를 이야기할 때 초의(草衣, 1786~1866)스님을 빼놓을 수 없다. 30세 되던 순조 15년(1815) 처음 만나 40년간 세간과 출세간을 떠나 금란지교(金蘭之交)의 우정을 이었다.

 

헌종 6년(1840)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돼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할 당시 추사는 초의스님과 7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추사를 위로하기 위해 초의스님이 제주를 찾아 6개월간 머물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추사의 편지...마치 연애라도 하는 듯 추사의 애교가 철철 넘친다. 

 

'새 차는 어찌하여 돌샘과 솔바람 사이에서 혼자만 마시면서 애당초 먼 데 있는 사람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요. 몽둥이 삼심방을 아프게 맞아야겠구려."

몇 번 편지에도 종내 답장이 없는 걸 보니, 이젠 아예 내가 보기 싫은 게로군. 나 보기 싫은 거야 그대 마음이니 어쩔 수 없고, 그대 탓에 몸에 밴 끽다 습관만은 책임지시게. 인이 박혀 도무지 차를 마시지 않고는 정신이 들지 않으니 하는 말일세. 답장은 받고 싶지도 않네. 그대를 보고 싶은 맘도 전혀 없네. 그저 딴소리 말고 잘 닦은 차나 작년 치까지 합쳐 곱빼기로 보내게. 

 

김정희의 제자 소치 허련이 그린 추사 초상/ 초의선사 영정

 

추사의 말년....

추사는 제주에서 귀양을 살면서 학문을 연찬하는 한편 서예와 그림에 집중하며 고독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헌종 14년(1848)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3년 뒤에 권돈인 사건으로 함경도 북청에서 귀양을 살았으며, 철종 3년(1852) 풀려난 후에는 부친 묘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며 지냈다.

 

그의 마지막 글씨는 철종 7년(1856)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광주 봉은사(지금의 서울 강남 봉은사)의 ‘版殿(판전)’이다. ‘七十一果病中作(칠십일과병중작)’이란 글이 적혀 있는데, ‘71세 과천에서 병환 중에 지었다’는 의미이다.

죽기 3일전 병든 몸으로 두 글자로 욕심없는 필치다.

 

 

추사의 부음을 듣고 초의스님은 제문을 지어 올리고, 그 뒤로 일지암에 들어가 1년 뒤 원적에 들 때까지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초의선사가 지은 제문이다. 두사람이 얼마나 각별한 친교인지 알 수 있다. 

 

"42년의 깊은 우정을 잊지 말고 저 세상에서도 우리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세. 생전에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대 글을 받을 때면 얼굴을 마주하는 것 같았고, 우리 서로 나눈 얘기들은 정녕 허물이 없었지. 더구나 제주에서 반년을 함께 지냈고, 용호에서는 두 해를 같이 살지 않았었는가. 도를 담론할 때면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네. 그대의 정담은 실로 봄바람이고 따스한 햇살이었네.

 

초의선사는 추사가 죽고나서 10여년을 더 살다 81세때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