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8일(화) 저녁 7시 동네책방 꿈꾸는 책방...
김은숙 시인과 함께하는 책방 통통
동화작가 김송순님의 [반반 고로케] 북 콘서트에 참석했다.
진행자의 선물로 박카스의 산문집을 받으신 분...
나랑 같은 아파트산다고 명함을 전해주셨다.
집에와 검색하니 베테랑 수필가이시네요.
'먹을 갈다' 문인화그리는 박카스의 관심분야인데...ㅎㅎ
며칠 후 내 아파트 우편함에 이 수필집이 꽂혀있었다.
"고맙습니다. 잘 읽어볼게요."
거푸 시련이 닥쳤을때 힘을 준 것은 글이었다. 살아온 일상을 잔잔하게 그리면서 이야기를 풀다보면 나도 모르게 치유가 되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날들. 소소한 삶에 한 줄기 빛으로 이어진 수필과의 인연을 맺은 건 참으로 잘한 일이다. 수필이 있어 덜 외로웠고, 너무 탈진해 주저앉았다가도 일어설 수 있었다. 이제 내게 수필은 걸어온 길의 기록이고 기억에 새겨진 결이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힘을 건네주는 에너지의 근원이다.
- '작가의 말'에서
먹을 갈다
모임득(충북지부)
천년을 묵은 빛이다. 무덤에서 발견되었다는 먹, 선명하게 남은 단산오丹山烏자 밑에 한 일一자의 획만 보이는데 이는 옥玉의 첫 획으로 먹을 갈아 사용하고 남은 부분이리라.
국립 청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단산오옥은 우리 전통 먹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단산오옥으로 쓴 글이나 그림은 오래될수록 검고 빛이 바래지 않아 더 깊은 맛이 난다고 한다. 출토 당시의 사진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먹은 사용했을 선비의 머리맡에 두 동강 난 상태로 있었다. 1998년 청주 동부우회도로 건설구간인 명암동 유적에서 발견된 목관묘에서 나왔으며 현재 전해지는 고려 시대 먹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가장 좋은 먹을 단산오옥이라고 한단다. 앞면의 가장자리에는 물결무늬가 중첩돼 있고 뒷면에는 우아한 곡선으로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표현한 비룡 문이 새겨져 있다. 고려 시대로 추정되어 보물로 지정된 먹은 멋스럽기도 하거니와 먹을 만든 장인의 숨결도 느껴진다.
‘천년의 먹 향기 단산오옥전’을 보고 귀가해 장식장에 보관된 연적을 꺼냈다. 연꽃 봉우리 같은 몸체, 두 가닥의 연 줄기를 꼰 모양의 손잡이, 연잎을 말아 붙인 모양의 귀때가 있다. 몽우리 아래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어 귀때와 함께 연적 구실을 하게 되어 있다. 아쉽게도 물 따르는 부리는 깨어졌다. 언제부터 이 연적이 우리 집에 있었는지 기억에 없다.
평생 농사를 지으셨지만, 서당 훈장을 하면 딱 어울리셨을 시아버님. 성성한 머리칼, 굴곡진 이마, 거칠어진 손이지만 틈나면 붓글씨를 쓰고 고서古書를 즐겨 읽으셨다. 이 연적도 문방사우와 더불어 소반이나 책상 위에서 고졸한 멋을 풍기며 늘 아버님과 함께했을 것이다.
선비 같으신 시아버님을 존경하고 많이 의지했었는데 왜 소원疏遠해졌을까? 아마도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진단 결과가 나오면서 그리된 것 같다. 신혼 때는 아버님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도타운 정을 나누며 지내었고 시부모님은 맏며느리를 많이 의지하신다고 믿으며 20여 년 동안 살았었다.
하루가 다르게 까라지는 남편을 보며 시어머님은 울기만 하셨고 아버님은 묵언 수행 중인 스님처럼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나와 우리 아이들이 투병 중인 가장을 보며 아픔을 견디듯 시부모님의 가슴도 피멍이 들 거라고 스스로 이해했다. 5년의 투병에 지친 남편은 서둘러 가족 곁을 떠났고, 상속 문제로 시어른의 인감증명서가 필요해 말씀드렸더니 거절을 하셨다.
우리네 세상에는 숱한 느낌표가 있다. 먹을 간 벼루에 똑같이 붓으로 먹물을 묻혔는데도 사랑이라고 쓰면 사랑이란 글이 되고, 미움이라고 쓰면 미움이 된다. 사랑이라고 쓰는 이의 얼굴은 평온할 테고 미움이라 쓰는 이는 그렇지 않으리라.
연적에 물을 담았다. 한 손에 쥘 만한 알맞은 크기이다. 내친김에 벼루에 물을 따랐다. 몽우리 진 연꽃 모양의 연적 귀때로 물이 순하게 떨어진다. 먹을 갈 때는 마음을 다잡아 갈아야 한다. 벼루에 물을 적게 따르면 먹이 잘 갈리지 않고, 너무 많이 따르면 먹 갈기가 조심스럽고 먹물도 흐려 붓글씨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
먹을 조금 갈았는데 팔이 아프고 호흡이 고르지 않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이다. 다시 손끝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마찰에 집중한다. 먹을 가는 일은 어쩌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먹 향이 진하게 우러나오려면 장시간 갈아야 한다.
갈아진 먹물을 붓에 충분히 묻힌 다음 붓을 벼루에 훑어 먹물이 떨어지지 않게 한 다음 서툴지만 글을 써본다. 붓끝에 먹물이 스밀 때의 느낌, 화선지 위에 스미는 먹물의 기운을 참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먹은 벼루에서 갈린다. 자신을 없애면서 글씨와 그림을 그리게 한다. 어찌 보면 자신을 희생해가며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는 부모님과도 같다. 나 역시 자식을 키우는 어미로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텐가.
연적의 물을 벼루에 따라본다. 뚫어진 공기구멍이 있어 물은 순하게 흘러내린다. 자신을 갈아 글씨를 낳은 먹처럼, 뼈 빠지게 한평생 농사를 지어 자식을 길러낸 시아버님처럼, 소임을 하다 귀때 부리가 깨진 연적처럼, 그렇게 한 생애 살아가는 거라고, 마음을 넓혀 더 이해하라고, 고려 시대 먹, 단산오옥이 내게 일러주는 것 같다.
모임득 수필가의 또다른 한편...
중풍으로 돌아가신 울어머니 오버랩되네.
아버지의 고무신
뒤뜰과 연결된 한지 문을 여니 연초록 감나무 잎사귀가 시야를 산뜻하게 한다. 신발을 신고 내려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잎새 사이로 비치는 햇살 조각이 눈부시도록 정겹다. 모처럼 들른 친정집. 아버지가 생존해 계셨으면 돋아나는 대로 뽑아 내셔서 이렇게 풀밭처럼 되진 않았을 텐데, 앞마당과 뒤뜰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 가슴을 아련하게 한다. 돌 틈으로 돋아난 풀을 조금밖에 뽑지 않았는데 땀이 흐른다.
난 두 손으로 뽑아도 이렇게 힘이 든데, 몸이 불편하시던 아버지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한 채 한 손으로 뽑으셨다. 뽑고 뽑아도 무한정 자라는 이 풀들처럼, 우리 자식들이 서운하고 매정하게 나 몰라라 할 때도 아버지의 사랑은 항상 변함이 없으셨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고도 회식 자리까지 끝내고 오빠 집으로 갔었다. 빈혈이나 햇볕을 많이 받아 잠깐 쓰러지는 것만 생각하던 내게 아버지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이 눈만 깜빡거리며 누워 있으셨다.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여 어머니의 정성 어린 간호를 받으며 절룩거리시는 몸으로 내려오신 뒤 침을 잘 놓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지 모시고 다녔다.
쓰러지신 뒤 일 년 뒤에는 말씀은 어눌하게 하시고 오른쪽은 못쓰신 채 모든 일을 왼손으로 하시게 되었다. 시골화장실이 불편하여 신혼시절 우리 집에 머문 적이 있으시다. 생선도 징그럽다며 요리하기를 꺼려하던 나였었다. 중풍에는 개고기가 좋다고 하여 사다가 삶는데 다리가 어찌나 긴지 찜통 바깥으로 자꾸만 나오는 개다리를 돌리고 돌려 삶아 아버지께 드리곤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어쩌다가 들러도 굳어 있는 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아 드리지도 않았다.돌 틈의 풀을 다 뽑고 화단으로 올라서기 전 댓돌 위에 앉아서 잠시 쉰다. 땀을 닦으며 문득 바라본 굴뚝 옆에 지팡이가 서 있고 밑에는 고무신 한 켤레가 보인다. 주인 잃은 지팡이와 고무신에는 뽀얗게 먼지가 서려 있다.칠 년여를 중풍으로 고생하시다가 또 다시 쓰러지셔서 돌아가셨다. 유품을 정리할 때 빠뜨린 모양이다.
반쪽을 못 쓰시니 오른발이 무감각인데다가 부었다. 구두는 엄두도 못 내고 운동화를 신으셨는데 신기도 불편하실 뿐더러 하루 종일 걸어 다니시는 터에 고무신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하얀 고무신이었던 것이 때가 잘 탄다는 이유로 청색의 고무신으로 바뀐 뒤 외출하실 때만 하얀 고무신을 신으셨다. 그러니 건강한 몸으로 외출할 때 신으셨던 구두 한 켤레는 신발장에 고이 모셔져 바깥 구경 할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고무신을 신고 지팡이에 의지하신 채 절룩거리며 아랫마을까지 다녀오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그날 저녁 밥상에서는 어머니에게 누구네 벼에는 병이 들어 약을 쳐야 되겠고, 누구네 밭의 고추가 실하게 달려 있고, 사촌 집에 담배 순을 쳐야 되겠다며 어눌하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잘 못 알아들어도 어머니는 알아들으시고 오순도순 말씀을 나누셨다.
부부간의 살가운 정이 새록새록 느껴지던 그 모습이 그리워서 콧등이 시큰거린다. 당신의 평생 생활 터전이었던 논과 밭을 보며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오로지 자식 잘 가르쳐 보겠다면서 두 손 걷어붙이고 열심히 일하던 몸 건강하실 때의 모습을 회상하고 계셨던 건 아닌지.
주말을 이용하여 고추를 딸 때면 한 손으로라도 거들던 아버지. 길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줍고 가로등을 시간 맞춰 켜고 끄는 것은 물론 동네 회관이며 우리 집 안방까지 한 손으로 걸레를 든 채 닦고 또 닦으셨다.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면 어머니는 보던 드라마를 계속 보셔도 아버지가 비설거지를 하셨다. 행여 자식들이 온다는 연락이 있으면 방마다 보일러 켜고 끄는 것도 아버지 몫이었으니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내가 방에 불 조절을 잘못하여 더운 방은 너무 덥고 다른 방은 냉방에서 떨기까지 했다.
고무신을 가만히 가슴에 안아 본다. 지금이라도 이 고무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은 채 활짝 웃으며 대문을 들어서실 것 같은데, 하회탈 같은 미소는 어디 가고 뒤뜰에 핀 함박꽃만 눈에 들어온다. 뒤뜰의 돌담이 담쟁이 넝쿨로 덮이고 함박꽃이 활짝 필 때면 감나무 옆의 부추는 제법 자라 있었다. 부추를 자르고 애호박을 넣어 부침개를 부쳐 드리면 맛있다는 표시로 웃어 주시며 잡수시곤 하였는데…….
주인 잃은 부추만 한 뼘이나 웃자라 있다. 고무신을 들고 수돗가로 향한다. 대야 속에 잠긴 고무신을 보니 아버지의 발을 씻겨 드릴 때가 생각이 나서 눈시울이 적셔진다. 그동안 힘든 농사일의 훈장이라도 되는 듯 양쪽 발바닥엔 뚝살이 박여 있었다. 힘줄도 보이고 감각이 있는 왼발에 비해 오른발은 약간 휘어진 듯 하면서도 많이 부어 있어서 씻겨 드리기가 힘이 들었었다. 아버지의 발이라도 씻겨 드리는 듯 수세미는 제쳐 두고 손으로 고무신을 정성스럽게 닦는다. 비누칠을 한 다음 여러 번 헹구어 댓돌 위에 세워 놓았다.
어렸을 때 어둑해지면 지게 지고 대문을 들어서던 아버지는 샘물을 퍼 올려 바짓단 걷어 올리고 씻으신 후 검정 고무신에 들어간 물 빠지라고 댓돌 위에 세워 놓곤 하셨는데…….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발에는 고무신이 신겨 있을 때가 많았다.
요즘 흔한 슬리퍼도 일할 때 거추장스러우니까 아예 신지를 못하고 검정 고무신에서 시작하여 청색, 하얀색만 신다가 가시는 저승길에도 하얀 고무신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의 체취가 오롯이 남아있는 고무신을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신발장에 모셔 두었다. 앞으로 친정집에 들를 때마다 아버지를 보듯 꺼내어 닦아 두어야겠다. 고무신을 신고 대문을 들어서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 또한 그리면서…….
아버지의 고무신을 가슴에 품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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