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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時習/문학동네

퓨전수필 & 마당수필- 윤재천

by 박카쓰 2021. 7. 27.

얼마전 안성에 갔다가 한 카페에서 그의 문학비를 발견했다.

 

운정 윤재천 문학비

 

 

오늘은 푸른솔 문학 여름호를 열다가 이 분을 발견했다. 

아~ 내가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대한민국 수필계의 代父격인 분을...

 

 

 

서둘러 2편을 키보드로 필사하며 읽어본다. 

 

 

퓨 전 수 필 

 

   21세기는 퓨전수필 시대다.

  변화에 지나치게 민감한 것도 문제가 되지만, 적절히 대응하지 않으면 작가로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자신의 색깔에 고정되어 있기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구축해 상황에 따라 대응하는 융통성이 필요하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려면 고정된 사고에서 탈피하여 다양성을 지녀야 한다.

 

  세계가 벽을 허무는 시대다. 이 시점에서 서정수필 만을 고집하는 것은 세계화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쇄국 수필이 된다. 감상적이고 자기 고백의 기록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퓨전수필을 기점으로 메타수필, 접목수필, 마당수필, 테마수필, 실험수필, 웰빙시대에 맞는 작품을 써야 한다. 퓨전은 넓게 만남을 의미한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만이 아니고, 다른 장르와의 만남을 의미한다.

  퓨전 음식점이 문을 열었다. 한식과 양식, 세계의 다양한 요리가 조화를 이루어 인기를 끌고 있다. 수필도 그 문화처럼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시적 요소, 희곡적 요소, 소설적 요소를 접목해 새로운 생명력을 심어 나가야 한다.

  21세기 수필에는 금기와 정석이 없다. 퓨전수필의 개념은 자기의 수필 세계와 다른 세계를 접목하는 것이다. 정형만을 주장하면 수필의 지평이 좁아진다. 논리와 비논리를 넘나들며 상상력을 끌어오기도 하며 자신만의 개성과 철학으로 문학성에 이르러야 한다.

영화가 이미 종합예술로 성공했듯이 수필도 서로 융합하고 아우르며 교감해야 글로벌시대에 맞는 작품을 내놓을 수 있다. 융합을 통해 문예예술의 전면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 영역을 확보하며 영지를 확대할 목적으로 모색된 것이 퓨전이다.

‘그림과 시가 있는 수필’, ‘그림 속의 수필’, ‘수화隨畵 에세이’ 발간이 그 예다. 고정관념은 시대와 소통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면모를 통해 독자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목표다.

 

현대사회를 압축하면 ‘퓨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신세대는 시를 랩 리듬에 맞춰 낭송하거나, 몸짓 또는 영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여 새로운 호응을 받고 있다.

 

작가가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작품을 쓰려면, 독자의 의식 수준을 읽고, 그보다 앞서야 하고 심금을 울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작품에 부합하는 다양한 정보와 함께 음악과 그림, 타 예술도 배치해야 한다.

 

톨스토이의 작품이 동토에서 구소련 사람들에게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듯, 작가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접목한 ‘퓨전수필’이 시대에 맞는 희망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작가의 자유로운 표현 세계는 현실 너머 더 큰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마 당 수 필 

 

  닭 우는 소리가 새벽을 깨우던 시절이 있었다.

  맑은 기운이 온 천지를 뒤덮기 시작하면, 힘차게 울어대는 동물의 울음소리에 반복되는 일상 속의 하루가 열린다. 요즘은 휴대폰 모닝콜이나 자명종의 명랑한 소리로 하루를 시작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첼리스트 장한나는 오늘의 자신을 만든 주체가 스승인 로스트로포비치의 “네 스스로의 음악 세계를 열어 나가라”는 한마디 말이었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열어갈 때, 천재성을 발휘하는 것이 수필이다.

  수필쓰기에서도 구성이나 소재, 주제에 대해 디테일한 강의를 하지 않는 것은 선험先驗의 이론 없이 열린 마음으로 글을 쓰라는 의도다. 각자 좌충우돌, 천신만고의 시련을 통해 얻어진 작법이야말로 자신만의 노하우와 창의성으로 타인의 글과 비교될 수 없는 특색을 갖게 된다. 수필은 다루지 못할 소재가 없고, 건드리지 못할 주제가 없는 열린 문학이다.

  마당놀이는 우리 전통의 열린 무대로 관객과 소통하는 화합의 장을 보여준다. 풍자와 해학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공연자와 관람자가 웃고 울며 하나가 된다.

  작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이 필요하다. 혁신적인 글 세계를 열기 위해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시도해야 한다. 바탕을 탄탄히 해야, 목소리 높여 주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독자를 흡인시키는 힘이 생긴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세상은 광활한 우주이거나 좁고 깊은 크레바스와 같은 암흑세계가 되기도 한다.

  마당놀이는 출연자와 관객의 구분 없이 흥겹게 하나가 되는 화합의 마당이다. 우리 수필도 안방에서 뛰쳐나와 한마당 ‘얼~쑤!’ 하고 어깨를 걷고 신명나게 춤사위 판을 벌여야 한다. 탁 트인 마당과 함께하는 놀이판에서는 관객이 있어 명창의 소리가 돋보이는 것처럼, 수필도 열린 마당이 있어야 너나없이 어깨춤이 절로 나올 수 있다.

  전후戰後의 암울한 현실로 인해 50년대의 서울 거리는 피폐하고 어두웠다. 예술인들은 배고픔을 참으며 명동으로 모여들었고, 죽은 나무에 꽃을 피우는 심정으로 예술혼을 불살랐다. 다방과 선술집, 음악 감상실, 화구점이 창작의 산실이 되었고, 열악한 환경을 딛고 창작극을 무대에 올리고, 또 전시회를 가졌다. 시절은 암울했지만 예술인들의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에 '명동시대를 아름다웠다고 회상한다.

  한적한 농가에서 새벽 운무를 가르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새롭고 활기찬 하루를 열 듯, 수필에도 항상 새롭게 도전하는 아방가르드 정신이 필요하다.

  마당놀이를 하듯, 어깨춤을 추며 '얼~쑤!' 장단으로 추임새를 넣을 때, 수필도 독자와 함께 한마당으로 어우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