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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時習/문학동네

아름다운 싯귀를 화제(畵題) 로...

by 박카쓰 2021. 1. 13.

길 


우리 가는 길에 화려한 꽃은 없었다
자운영 달개비 쑥부쟁이 그런 것들이
허리를 기대고 피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빛나는 광택도
내세울 만한 열매도 많지 않았지만
허황한 꿈에 젖지 않고
팍팍한 돌길을 천천히 걸어
네게 이르렀다

살면서 한 번도 크고 억센 발톱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귀뚜라미 소리 솔바람 소리
돌들과 부대끼며 왁자하게 떠드는 여울물 소리
그런 소리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 형제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음성도
세상을 호령할 명령문 한 줄도 가져보지 못했지만
가식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며
네게 이르렀다

낮은 곳에는 낮은 곳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있다
네 옆에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빈자리가 있다


 

 

어떤 날 / 도종환

어떤 날은 아무 걱정도
없이 풍경 소리를 듣고 있었으면
바람이 그칠 때까지 듣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집착을 버리듯
근심도 버리고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나뭇잎을 다 만나고 올 때까지 홀로 있었으면

어떤 날은 나무잎처럼
즈믄 번뇌의 나무에서 떠나 억겁의
강물 위를 소리없이 누워 흘러갔으면

무념무상 흘러갔으면

 

 

갈 필  도종환

 

안간힘을 다해

남아있는 것들을 끌고가

끝에 이른 뒤 쓰러져 누운 획들

먹물은 고갈되고 목은 마르던

메마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더 아름다워진 갈필

부족 했지만

모자랐지만

그 모습 그대로 완성에 이른

글씨를 본다

 

세모 한 올 한 올까지 다 달려나가

몸을 던져 이룬 애절한 투신

너도 내 인생의 몇 글자를

저렇게 몸 던져 완성 하면서

획을 그으면서

여기까지 왔는가 

 

 

혼자 사랑 

혼자서만 생각하다

날이 저물어

 당신은 모르는 채

돌아갑니다

혼자서만 사랑하다

세월이 흘러

나 혼자 말없이

 늙어갑니다

 남 모르게 당신을

사랑하는 게

 꽃이 피고 저 홀로 지는 일

같습니다

 

 

여백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좋은 사람 - 노영심

 

좋은 사람은

가슴에 담아 놓기만 해도 좋다

차를 타고

그가 사는 마을로 찾아가

이야기를 주고 받지  않아도

나의 가슴에는 늘

우리들의 이야기가 살아있고

그는 그의 마을에서
나는 나의 마을에서
조용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어쩌다 우연한 곳에서

마주치기라도 할 때면

날마다 만났던 것 처럼

가벼운 애기를 나누고

헤어지는 악수를 쉽게도 해야겠지만

좋은 사람은

가슴속에 담아 놓은 것만으로도

우리들 마음은 늘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