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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山樂水/경북대구

금사모 가을여행,예천-상주(19.11/3,일)

by 박카쓰 2019. 11. 3.


금천동1박2일모임 가을 나들이~~~

10쌍 20명중 16명이 참가했지요.

28인승 우등버스에 가득 채우게 가면 좋을 텐데...






괴산 거쳐 시루봉 휴게소에서 쉬고  산북면을 지나 경천호...









예천 초간정에 도착했습니다.





초간정은 풍류나 안식을 위해 지은 정자가 아니다. 조선시대 정자는 보통 관직에서 은퇴한 사류가 노후의 안식을 위해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세와 탐욕이 만연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은일하고자 하는 은둔자에 의해 지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안식이나 은일과는 전혀 다른 학문과 집필을 위한 공간으로 쓰인 정자가 있다. 오롯이 묵향으로 가득 찬 정자가 바로 초간정이다. ‘초간’이라는 뜻은 당나라 시인 위응물이 읊은 시 〈저주서간(滁州西澗)〉의 “홀로 물가에 자라는 우거진 풀 사랑하노니(獨憐幽草澗邊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는 관향이 예천이다. 총명한 자질을 타고난 그는 유년 시절에 아버지 권지로부터 가학을 전수받았다. 초간의 행장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글을 읽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총명함이 넘쳤다고 한다. 일례로 역사서를 읽으면 눈에 한 번 스친 것은 모두 기억하는 능력을 지녀 인물의 성정, 문장, 내용의 높고 낮음에 대해 일별로 모두 헤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우 문연(文淵)과 함께 용문사에서 공부할 때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혹독하게 매진하여 늘 밤을 밝힐 등잔 기름이 모자랐다고 한다. 가학에 통달한 권문해는 1546년 한서암(寒棲庵)으로 가서 퇴계 이황에게 수학한다. 총명한 두뇌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그는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며, 명종 15년(1560) 별시문과에 병과로 대과 급제한다.

권문해는 명종조부터 선조에 걸쳐 벼슬길에 나갔다. 우부승지, 좌부승지, 관찰사, 목사 등의 중앙관료와 지방수령을 역임했다. 그는 공주목사직을 사임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기 위해 초당을 짓는다. 이 정자가 바로 초간정이다. 1582년 그가 49세 되던 해 완성한 초간정은 그의 종가에서 약 2km 떨어진 풍광이 아름다운 금곡천 계류가에 조성되었다.




학문과 집필의 공간이었던 초간정 원림은 묵향으로 가득 찬 곳이어서인지 초간이 56세 되던 해에 얻은 아들 권별(權鼈, 1589~1671) 또한 이곳에서 집필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 1,000여 명에 달하는 인물을 대상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물사전인 《해동잡록(海東雜錄)》을 저술한다. 초간정 원림은 가히 묵향이 묻어나는 학문의 공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58개띠 끼리...







예천권씨 초간종택...







보물 제457호. 예천권씨 초간종택 별당은 초간종택의 사랑채를 지칭하는 것으로 15세기 말에 초간 권문해의 할아버지인 권오상이 지은 것이다. 권문해는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유성룡, 김성일 등과 친교가 두터우며 관직은 관찰사와 사간을 지냈다. 48세 때인 1582년에는 종택에서 3km 떨어진 용문경천로 874번지에 초간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3호, 지금의 정사는 여러 번 소실되었던 것을 1870년에 새로 고쳐 지은 것임)을 지었는데 냇가 절경에 지어진 정자로 그 일대는 명승 제51호로 지정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점심먹으로 맛고을 문화의 거리에 왔다.




회룡포를 내다보려고 비룡산에 올랐다.








삼강주막은 지나치고 상주 경천대를 찾았다.














청주로 돌아와 금천동 아구랑에서 저녁을 먹네.

그런데 왜이리 매운 거야...ㅠㅠ


소주 1팩만 사려다 좁쌀소리 들었지요.  ㅋㅋ

시장도 봐주고 남은 음식 떨거지도 해주시고

총무노릇 하기가 참 수월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