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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山樂水/세계방방

호치민묘,박물관&라이따이한의 눈물(19.2/26,화)

by 박카쓰 2019. 2. 27.


여행 4일차, 마지막 날

어젯밤 오색등불로 아름답게 수놓았던 호텔엔

오늘도 비가 내리며 축축하고 썰렁한 느낌마저 든다.




요즘이 雨期던가 여행내내 비가 내리네.

우산 폈다 접었다 그래도 이만한 게 다행이지.




와~이 빗속에도 우비를 걸쳐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




베트남의 오토바이는 사람수만큼 많단다.  

그렇다면 96,000,000대?

그 제품의 대부분이 일본 혼다, 스즈키라네.


헬멧착용이 의무화되어있다고 하지만 시늉뿐  대충 뒤집어쓰면 그만이고  

오토바이타면서도 스마폰을 만지작거리고 인도를 막 점령하고

자녀들 통학, 오토바이 택시, 택배 등등 오토바이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데... 




[퍼온 사진]

아수라장! 이 모습이 어쩌면 베트남이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한국의 발전상을 모델로 10년후 한국을 따라잡겠다는데

그만한 분위기가 충분히 느껴진다.






베트남의 민족적 영웅 호치민의 묘와 박물관을 보러왔다.

탐방객의 옷차림, 소지품, 사진촬영 철저히 통제되네.

아니 오늘이 평일이고 비가 이리 내리는데도

이렇게 엄청난 관람객이...




[퍼온 사진] 호치민 묘




호치민 묘가 만들어진 것은 1975년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묘는 연꽃 모양으로 꾸며져 있으며,

내부에는 호치민 주석의 유체가 유리상자 안에 안치되어 있네.

돌아가셨을때 내아버님 모습처럼 평온한 모습이네. 






이제 우리는 호치민 생가를 둘러보네.

실은 生家가 아니고 그가 주석으로 있을때 관저인셈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총독부 건물...

호치민은 이곳에서 거주하지않고

외국사절들과의 접견장소로만 사용했단다. 




호치민이 사용한 자동차...

구소련이 제공했다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유리창을 통해서만...





달랑 자그마한 침대 하나...

그의 검소한 생활을 볼 수 있네.




큰 연못...

일행과 연못을 돌며 우리나라 정치인들! 

비싼 혈세들여 다른 나라로 연수가지 말고

이곳에서 체험하며 연수시켜야한다고...ㅋㅋ




어디 정치인들 뿐이겠는가!

국민 모두가 그처럼 살아가야겠지.



어라! 이 나무 봐라~

고무나무에 야자수가?

연리지는 아니고 그참 희한하네.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베트남 국보 1호...


기둥이 하나로 되어있어 한기둥사원...

귀퉁이엔 베트남 國花 연꽃이 새겨져있네.




많은 사람들이 묵묵히 소원을 빌고 있다.

우리는 삼배를 하는데...





사원을 한바퀴 돌아 나오니 불교사당인듯




호치민을 기리는 호치민 박물관에 왔다.

1990년 5월 19일, 호찌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호찌민의 활동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개관하였다.

구소련의 원조를 받아 레닌 박물관의 전문가가 설계와 내부 장식을 담당했단다.




베트남 민족영웅 호치민...


호치민은 30여 년 간 베트남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끌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공산주의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1919년에 베르사유 회의에 8개 조항의 탄원서를 보내 인도차이나 식민지 국민들에게 통치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줄 것을 요구했다. 1930년 2월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고, 10월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1941년 귀국해 독립동맹 베트민을 구성했고, 1945년 프랑스와 일본이 무너지자 9월 2일에 베트남의 독립을 공표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은 프랑스가 베트남 남부를 장악하면서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8년간의 전쟁 끝에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 협정을 통해 남북으로 분할되었고, 이에 북베트남에 공산 정권을 수립하며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1966년 7월 17일 호치민은 북베트남인의 표어가 된, 다음의 메시지를 보냈다. "베트남 국민의 가슴에 독립과 해방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또한 1967년 2월 15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의 친서에 대해 그는 "우리는 폭격의 위협 아래서는 절대로 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베트남 전쟁의 향방이 완전히 결정되기 전인 1969년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에 있는 집에서 심장마비로 79세의 삶을 마감했다





호찌민 생가 모형, 애장품, 편지 등 호찌민 생애와

그에 관련된 모든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등 볼거리도 많은데 다들 내려갔네. ㅠㅠ

고무가 풍부한 지역이니 고무상품이 많네.





망고와 바나나 간식을 먹는 사이

재잘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

"와우~ 이곳으로 너희나라 영웅 호치민을 배우러왔구나!"


신채호 선생의 말이 생각난다.

"역사를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버스안에서 윤반장님이 들려준 라이따이한 조양호회장의 이야기는

들으면서도 눈물을 흘렸지만 두고두고 뇌리에 남아있네.


어릴적 영화보러가면 영화보기전 대한뉴~스에 이은 월남소식!!!

"가시는 곳 월남한 땅~ 부대 歌..."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 영화...  

 생사를 넘나들며 자유를 지키는 우리 군인들이 그토록 위대해보였는데...


하지만 그 이면에는 ...

가장 용감하다는 우리군인이 베트남 민간인 11,000명이나 무고하게 죽였고

전쟁후 540만명이 고엽제로 살아가고 그 후유증을 6대 후손까지 물려주고

남은 라이따이한들은 세파에 손가락질 받으며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을꼬.  




라이따이한...


라이따이한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던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2세를 말하는 말이다.
1955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북베트남에서는 사회주의 정책이 추진되었고 남베트남에서는 정권이 몇 차례 바뀌었지만 부정부패와 반복되는 쿠데타로 민심을 잃었다. 이에 베트콩으로 알려진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 결성되면서 남베트남에서 내전이 본격화되었다. 냉전으로 사회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의 대립이 심화되었을 때, 미국은 남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사회주의 세력이 동남아시아까지 확산될 것이라고 우려하여 베트남 전쟁에 직접 개입하였다. 미국은 우리나라 박정희 정부에 베트남 파병을 조건으로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이에 한국군도 베트남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1992년 한국-베트남 수교가 맺어지고 우리나라의 진정성있는 사과로

지금은 한국이 가장 좋아하는 국가이고 발전상이 롤모델이 되었다고...

한국 No.1 일본 Good, 중국 No Good. ㅋㅋ


베트남은 미래가 약속된 국가...

인구 1억명중 절반이상이 30세 미만의 젊은 나라...

풍부한 자원, 값싼 노동력, 젊은 인구, 부지런한 국민성

이제 베트남이 우리나라만큼 발전하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10시30분 이제 관광을 마치고 공항으로 돌아간다.

4일동안 안내하셨던 윤반장님, 현지 가이드 다이, 운전기사님


여행내내 베트남말은 딱 두마디만 했네.

씬 짜오!(안녕) 깜 언!!(감사해요)




3시간 30분 비행한 후 7시쯤 인천공항 도착

동태찌개로 저녁을 먹고 10시쯤 청주에 도착하네.


이번 여행을 기획하신 박*건사장님, 방랑자님, 산악회 임원님...

그리고 3박4일 함께한 청주오름산악회 회원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아쉽다!


이번 하노이를 둘러보며 북미정상회담을 환영하는 간판을 볼 수있었다.

두번씩이나 만나며 큰 기대를 불러모았지만 끝내 불발되고 말았다.

북미간 입장차이가 그렇게 크니 회담이 잘 이루어질 수가 없었제....





내게 또하나의 버킷리스트는 북한에 있는 산을 오르는 것

그리운 금강산, 북한땅에서 백두산, 묘향산, 칠보산...

다리 성할때 다녀와야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