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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모음/불교관련

절이 산에 많은 이유- 불교신문

by 박카쓰 2017. 6. 21.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의 글입니다.




한반도는 산(山)들의 땅이다. 전 국토의 70%가 산지이며, 웬만한 촌락의 뒤편엔 산이 있다. ‘산’의 인문적 가치는 ‘높음’이라는 객관적 현상과 ‘오름’이라는 실존적 도전으로 완성된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평온하거나 우습다. 만물을 두루 포용할 수 있는 자리여서, 부처님을 앉혀두기에 걸맞다.


우리나라 사찰은 위치에 따라 평지형 산지형 석굴형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평지형 사찰은 예로부터 나라의 도읍지 부근에 형성됐다. 주로 왕실의 원찰(願刹) 역할을 했는데 많은 도시인들이 자주 오가면서 불교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개성 영통사, 익산 미륵사지 등이 이런 식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패턴이었다. 널따란 토지를 소유했고 교단은 대지주 계급에 속했다. 석굴형 사찰은 천연 혹은 인공 석굴 안에 지은 절이다. 대표적인 것이 불국사 석굴암이다.


산지형 사찰이 가장 보편적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우선 탈속주의와 풍수지리설의 영향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 산악신앙이 유행하기에 알맞은 지리적 조건이다. 국토의 시원지를 백두산으로 삼았고 조상들은 산신이 나라를 지켜준다는 믿음이 강했다. 곤란에 처하거나 가뭄이 들면 산신에게 운명을 맡겼다. 금강산의 봉우리들이 불보살의 이름으로 장식된 사실에서도 산악신앙의 강렬함을 엿볼 수 있다.


세속권력과의 거리를 두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신라 말 선승의 결집을 이룬 구산선문은 말 그대로 산문(山門)이다. 수도였던 경주와 일정하게 떨어져 제도권의 귀족적 불교에 저항했다. 수행과 청빈으로 일관한 삶으로 민중의 호평을 받았다.


풍수지리학을 국내에 도입한 도선국사의 산천비보설(山川裨補說)은 산악신앙에 이론적 풍성함을 더했다. 산천비보설이란 기력이 쇠진한 땅에 일종의 ‘보약’을 먹여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일을 가리킨다. 풍수학적 관점에서 산은 살아있는 생명체다.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 산천순역설(山川順逆說)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도선국사는 지형이나 지세는 국가와 개인의 길흉화복을 좌우할 만큼 매우 중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인체에 뜸을 놓듯이 기운을 북돋워야 할 산에 절과 탑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막강한 후견인이었던 고려 태조 왕건이 이를 충실히 실천했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조선왕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었다. 이성계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의 집권층은 중앙집권적 체제 강화를 위해 사찰과 스님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절 땅을 몰수해 세수(稅收)를 비약적으로 증장시켰고, 승려의 대량 환속 조치로 군역을 충당할 머릿수를 대폭 늘렸다. 3대 임금 태종은 242개의 사찰만 남겨두고 모조리 없앴다. 빈털터리에 천민 대접을 받는 스님들은 백성들의 눈에 띄는 곳에 남아날 수가 없었다. 극소수의 원찰을 제외하고는 모든 절이 산 속으로 숨어들어 무속과 함께 연명했다. 그러나 기어이 살아남은 절들은 유서 깊은 기도도량으로 오늘날까지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불교신문3157호/2015년11월28일자]

 

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