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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時習/인문학

名妓 황진이가 남긴 시조 6편속에는(17.5/27,목)...

by 박카쓰 2017. 5. 27.

오늘 문학강론시간에 교수님께서 황진이를 언급하셨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그녀의 시를 배운 적이 있지.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말라...

그리고 학자 서경덕을 유혹했는데 실패했다고...

그리고 이렇게 알고있다.

 

 

황진이(1506~1567?)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서예가, 음악가, 무희...

조선 중종 명종때 활동했던 기생 

 

 

 

 

 

[백과사전에서 퍼온 글]

우리는 역사적 인물을 바라볼 때 흔히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기 쉽다. 한 사람을 ‘정치가’라거나 ‘장군’이라거나 ‘충신’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평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황진이도 ‘기생’이라는 선입관으로 평가하고 이야기한다. 동시에 기생이지만 시도 잘 짓고 거문고도 잘 타고 춤도 잘 추고 얼굴도 예쁜데다, 남성들을 농락하는 교태를 지니고 서경덕과의 일화도 남겼다는 정도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들 이야기는 다분히 남성적 흥미로 엮어진 것들이다. 전혀 틀린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녀의 참모습이 이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리하여 다시 공부해보게되었네.

 

황진이는 우리 문학사에 6편의 시조를 남겼다.

 

어져 내일이야 그럴 줄 모르더냐

있으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아이쿠, 나 좀 바라 내가 그리워 할 줄 몰랐더냐

더 있으라고하면 가지 않을수도 있는데 구태여

보내놓고 그리워하는 건 또 뭐냐

 

 

 

 

얼마나 이뻤으면 임제는 황진이가 죽은 후

무덤을 찾아가 이리 노래했을꼬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백과사전]

그녀는 단순한 명기나 가무 예술인이나 시인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대의 모순과 관습에 저항하여 남성들을 비웃기만 한 저항의 여성만도 아니었다. 뒷날 백호 임제는 그녀의 무덤에 잔을 붓고 통곡했다. 임제가 누구인가? 그는 좁은 조선 땅에서 태어난 것을 한탄하고 좀스러운 인간군상에 구역질을 느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며 호탕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황진이의 무덤에서 통곡한 뜻은 단순히 정인으로 여겨서가 아니었다. 황진이의 후반기 생애와 견주어봄직하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황진이의 시

자신을 찾아온 왕족 벽계수에게 이렇게 읊었다지.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오기 어려외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수여간들 엇더리

 

[백과사전] 

종실인 벽계수(碧溪守, 여기서 ‘수’는 왕자의 증손에게 주는 정4품이다)는 황진이를 한번 만나기를 원했으나 황진이가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알고 있는 시인 이달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이달이 방법을 일러주었다.

“어린애를 시켜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고 황진이의 집을 지나 누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 한 곡조를 타고 있으시오. 그러면 황진이가 나와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만체하고 재빨리 말을 타고 달아나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취적교를 지날 때까지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이요. 만약 이를 어기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벽계수가 그 말대로 하자 황진이가 취적교까지 따라오더니 수행한 어린애에게 “저 분이 벽계수냐”고 묻고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한데 쉬어간들 어떠하리
- 서유영 《금계필담(錦溪筆談)》

노랫소리를 들은 벽계수가 뒤를 돌아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이를 본 황진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돌아갔다.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한낱 풍류랑(風流郞)이로구나.”

 

 

 

 

 

 

 

 

황진이는 서경덕이 처사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하였으나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그를 사모하였다.

거문고와 술, 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하여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서경덕

조선 중종·인종 때의 유학자.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렸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어렵게 공부했으나 벼슬길에도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송도 화담에서 초막을 짓고 청빈하게 살며 학문에만 정진하며 살았다. 유학의 근본 입장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기일원론을 주장하여 퇴계 이황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율곡 이이는 독서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연구하고 탐구하는 서경덕을 높이 평가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인 《화담집》이 있다.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과 허균의 아버지 허엽을 제자로 두었다. 1578년 선조는 그를 우의정에 추증하고,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수업중 교수님이 잠깐 읊어주셨지요.

 

동짓달 기나긴 밤의 한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날 밤이여든 구비구비 펴리라

 

기나긴 겨울밤 님 그리며 지새는 여인...

수줍은 듯 섬세한 연모의 정을 느끼는 듯 합니다..

그런데 과연 여기서 말하는 어른은 누구일까요?

평생 사모하였던 스승 서경덕 선생일까요?

 

 

권교수님도 강변하신다.

이런 여인에 화답하지 않는 남자는 남자도 아니다.

그럼 서경덕선생은 神이겠지...ㅋㅋ

 

 

 

또 이런 시를 남겼다 

 

산은 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흘러가니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 가고 아니 오더라.

 

스승 서경덕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것이라 한다.

어쩌면 기생 황진이도 나이들며 인생은 흐르는 물과 같아

순간을 머무르다 가는 것이니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노래하였겠지.

 

 

 

 
 

내 언제 무신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소겻관데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업네 
추풍(秋風)에 지는 닙 소야 낸들 어이하리오

 내 언제 믿음 없어 임을 언제 속였기에 
 달 기우는 삼경에도 오시는 소리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소리니 낸들 어찌하랴

 

 

 

 

청산은 내 뜻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님의 정(情)이

녹수(綠水) 흘러간들 청산(靑山)이야 변할손가

녹수(綠水)도 청산(靑山)을 못니져 우러예어 가는고

 

청산은 나의 뜻이요 녹수는 임의 사랑

녹수가 흘러가도 청산은 변치 않네

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저리 울며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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