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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時習/역사저널

우암 송시열, 성리학 대학자임에도 왜 사약을?

by 박카쓰 2016. 11. 18.

 

우리고장 옥천출신이자

조선시대 대표적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

그의 83세 파란만장한 삶을 다시 조명해본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힘있고 논리적인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고 평생 주자학연구에 몰두하여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이었다. 선조40년에 태어나 숙종15년에 생을 마감한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라고 한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 擊蒙要訣' '기묘록 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으며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 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으나 임금의 부르심으로 관직을 맡게 된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朱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효종이 급서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은 기년복(朞年服 : 만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하면서 3년복(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던 남인의 윤휴(尹鑴)와 대립했다. 예송은 '경국대전;의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결국 1년복으로 결정되었지만 이 일은 예론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이 정권을 둘러싼 당쟁으로 파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송을 통해 남인을 제압한 송시열은 효종에 이어 현종이 즉위한 뒤에도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혀 나갔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제2차 예송이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 :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것)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을 내세운 남인에게 패배, 실각당했다.

 

 

이듬해 1차 예송 때 예를 그르쳤다 하여 덕원으로 유배되었고, 이어 웅천·장기·거제·청풍 등지로 옮겨다니며 귀양살이를 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재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다시 등용되었으나 그 뒤 서인 내부에서 남인의 숙청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이 생겼을 때, 강경하게 남인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을 지지했다. 이로써 서인은 1683년 윤증(尹拯)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장파의 노론으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이것이 숙종의 미움을 받게 되어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같은 해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게 된다. 한 사발도 모자라 세 사발의 사약을 마시고 우암 송시열은 83세로 파란많던 삶을 마감하게 된다.

 

5년 뒤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우암 선생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된다

 

하지만 그토록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고 수많은 제자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83세 사약을 마시고 죽게되며 죽은후에도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대목이다.

 

 

 

 

화양동에 있는 유적 안내...

 

 

2020.8월말

요즘 유튜브로 역사를 공부하며 송시열이란 인물을 다시 살펴보고있다. 

 

잘못된 역사...
중국 청나라의 무력에 굴하지않는 민족자존 정신? 아니었다.

악대설화...효종은 양병(養兵)에 치중한 북벌 방책을 토로했으며, 송시열은 원칙론을 내세워 격치성정(格致誠正)과 양민(養民)을 강조하였다. 북벌의 뜻이 없었다. 북벌은 오히려 정적이었던 윤휴가 주장했다.

 

반청애국사상의 단면을 보여주고있다? 무슨 애국인가? 성리학(주자학)만이 옳고 친명배금정책으로 망한 명나라를 숭상하여 대의명분에 치우친 실리를 외면한 어쩌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왜곡되고 파괴당하는 수난? 글쎄...
노론의 영수로 노론이 왕보다 더 득세하여 수많은 정적을 죽였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그 원한으로 죽게되었고 그래서 역사의 평가도 달리되고 있는 것이다.  

 

이덕일 역사학자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도대체 우리는 학창시절 역사를 어떻게 배웠나?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하고 헛된 것을 알고있는 내 지식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