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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時習/역사저널

연극 '아나키스트, 단재'를 보고(12/8,목)

by 박카쓰 2016. 12. 8.

 

2016년 올해는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0주년의 해!

내고장 출신의 애국지사로 한국 근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선생의 올곧은 정신을 기리며 추모하는 행사가 잇다르고 있다.  

 

 

'역사가 미래다'

 

 

 

 

 

충북서예계에서도 해마다 봄이면 전국단재서예대전이 펼쳐진다.

박카스도 선생의 뜻을 기리며 이 서예대회에 출품하고있지요.

 

 

 

 

 

 

아나키스트 단재!

그런데 아나키스트는 무슨 뜻인가?

영어단어 anarchist

'무정부주의자' 라는 정확하지 않은,

다소 그 의미가 왜곡된 용어로 대신한다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개인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 부정하고

개인 자유 평등, 정의, 형제애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 가진 사람



단재의 아나키즘은 단순히 정부를 부정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민중에 의해 탄생하는 매우 효율적인 정부의 탄생에 오히려 주목하고 있습니다.

 

 

 

연극 '아나키스트, 단재'는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0주년을 맞아

단재의 정신을 재조명해 희미해진 역사관과 국민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자 한 작품이다.

특히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작품구상이 아닌 '신채호'라는 인물의 내면과

특정사건을 중심으로 작품을 구상해 그가 진정한 '아나키스트'였음을 말한다.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관객도 인사합니다.

멋진 공연 잘 보았습니다.

 

 

 

 

 

 

 

 

이 참에 단재 신채호 선생을 다시 공부해본다.

 

 

'민족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한다'

 

 

 

 

 

 

 [선생 일대기]

 

 굽힘 없는 강직한 성품에, 일본에 고개 숙이는 것이 싫어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세수를 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단기 4213년(1880년) 양력 12월 8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어났다. 9세에 자치통감을 통달하고, 13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해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동안은 그 박식함과 천재성으로 이름을 떨쳤다.
 
 26세에 박사가 된 선생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뛰어난 문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며 그 문명을 날렸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단재 선생에 대해 당대 우리나라 사가(史家)들 중에서 제1인자이며, 문장 호걸로도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한다고 했다.
 
 단재 선생의 첫 번째 일념은 조선의 독립이었고, 그것을 위해 찾은 대안이 민족사를 바르게 써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1910년에 맨몸으로 조국을 떠난 선생은 남북 만주로, 북중국, 시베리아를 주유하면서 조선의 역사를 연구했다. 선생은 수많은 유적지들을 직접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료들을 접하면서 우리 고대사(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음을 확인하며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라고 통탄했다.
 
 선생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도 조선사를 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많이 없어져버렸다고 비판하며 “집안현(고구려 유적지)을 한번 본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민족의 고대사를 바로잡고자 했던 선생은 중국망명 시절, 너무도 빈곤하여 우리 역사의 유적지를 눈앞에 두고도 돈이 없어 발굴조사를 하지 못함을 비통해 하였다. 또 책 살 돈이 없어 하루 종일 서점에서 책을 읽었는데, 조선에 관한 내용이 있으면 주인의 핀잔을 맞으면서도 요긴한 구절은 베껴 썼다. 또한 독서력이 뛰어나 책장을 헤아리는 것 같이 훌훌 넘기면서도 책 내용을 암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선생은 <조선문화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신문에 소개했는데, 수십만 독자들로부터 절대적인 환영과 지지를 받았고 ‘조선 역사의 대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선생은 기존의 한국사, 즉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 이어진 역사인식 체계를 비판하고 대단군조선-삼조선-부여-고구려 중심으로 계승되는 역사체계를 다시 세웠다. 그러면서 우리 역사는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만주대륙이 우리 민족의 영토였음을 밝혔다. 선생의 이러한 역사연구는 일제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된 주민들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