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저녁 청주학 연구회 주관으로
'내고장 청주를 제대로 알자'며 청주학 특강을 듣는데
이번 주는 청주읍성을 답사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몇년전 청주읍성탈환 행사에 참여하면서
청주에도 커다란 읍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오늘 그 성곽을 돌아보는 시간은 퍽이나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저녁7시 상당공원에 강의실보다 더 많은 분들이 참석하였다.
청주학연구회 책임연구원이자 청주읍성 복원에 가장 앞장선
향토역사학자 박상일박사가 대략적인 설명으로 시작되었다.
[박상일 박사가 충청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인용함]
청주읍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신라시대 서원경성(西原京城)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될 것으로 추측되고, 고려시대에는 읍성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록들이 자주 나타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읍석성(邑石城)의 둘레가 1,084보이고, 안에 우물 13곳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청주읍성에 대한 첫 공식기록인데 이후의 실록과 지리지 고문서 등에 많은 기록이 보인다. 읍성의 둘레는 약 1.8㎞에 이르고 청남문(남) 현무문(북) 벽인문(동) 청추문(서) 등의 4대문이 있었으며 남문과 북문에는 옹성을 갖추고 있었다. 성안은 남문과 북문을 연결하는 도로 즉 지금의 성안길을 중심으로 동서로 크게 나누어져 있었는데, 서쪽지역에 청주목 관아와 충청병영 그리고 사창 등의 주요시설이 위치하였고 동쪽지역에는 주택건물들이 밀집해 있었다.
지금의 상당구청 자리에 있었던 청주목 관아는 동헌 건물이 현존하고 있어 옛날의 영광을 보여준다. 이곳은 옛 청주목사가 주재하던 관아로서 일제강점기에는 청주군청이 되었고 1946년부터 청원군청으로 사용되다가 청주청원 통합시가 출범하면서 2014년 7월 1일부터 상당구청이 되었다. 많은 시민은 청주청원 통합 후에 군청 건물을 철거하고 관아공원이 조성되길 갈망했다. 효촌리에 상당구청을 신축할 때까지 당분간 한시적으로 이용한다고 하니 몇 년 더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구청이 옮겨간 후에는 이유 불문하고 관아공원으로 거듭나서 상처받은 청주의 자존심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갈 데가 없어 중앙공원으로 이전된 망선루도 원래의 위치인 관아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충청도의 육군을 총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의 옛터인 중앙공원에는 병영의 출입문이었던 문루(정곡루)가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청녕각(淸寧閣)’ 편액을 엉뚱하게 이 건물에 옮겨 붙인 까닭에 어느 책자에는 관원들이 기생파티를 하던 누정으로 소개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청주에서 평생을 살면서 청녕각을 보아왔다는 원로들의 거센 반론을 물리치고 1988년 5월 잘못 걸린 편액을 환원하고 명칭을 되찾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에게는 ‘응답하라 1988’의 추억이다. 1907년에 병영문 앞에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일이 있고, 1908년에는 비어 있는 병영으로 충북도청을 충주로부터 이전해 1937년 현 도청을 신축할 때까지 30년간 도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청주읍성은 신라시대 서원소경을 설치하면서 축조해 1천300년 동안 정치·행정·군사·경제·문화의 중심으로 청주를 수호해 왔다. 하지만 일제가 '시구개정사업'이라는 미명아래 1911년부터 14년까지 읍성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파훼한 뒤 성돌을 주변 하수구 축대와 도로 개설 등에 사용했다.
1920년 청주읍성 청남문...
일제강점기 이전의 청주읍성 안쪽의 병영 사진
이제 답사가 시작된다.
청주읍성 북문인 현무문...
동문 벽인문...
청주읍성 안에서 1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우리은행자리에 두개의 우물이 있었고...
복원되는 우물...
중앙공원 서편의 성벽 35m 구간을 복원하면서
조금이나마 읍성의 옛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답사팀...ㅎㅎ
이 일행중에 25년전 이웃사촌인 한선생님 사모님을 만나네요.
지금은 이은* 문화해설사로 일하신다고...반갑네요^^
청주읍성 탈환큰잔치...
조선시대 최대의 국란이었던 임진왜란...정부군들은 왜군에 연전연패하며 청주읍성도 왜군이 점령하고 있을때 청주 의병과 승병 700여명이 홀연히 일어나 청주읍성을 탈환한 왜란 최초의 승전사...이 자랑스런 역사를 청주의 정신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박상일 박사의 청주읍성 복원 축원문중 일부]
청주의 원도심에 굳건하게 서있던 읍성은 오랜 역사도시로서의 위상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존재였으며 청주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최근에 이르러 청주읍성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와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실체가 없는 현실에서 읍성을 제대로 알기에는 난제들이 많다. 3년 전에는 성돌모으기 운동도 벌이고 중앙공원 서편의 성벽 35m 구간을 복원하면서 읍성의 옛 모습을 조금씩이라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지만 지금은 이마저도 시들해졌다. 그래도 매년 9월에 거행되는 청주성탈환축제를 통해 읍성을 추억할 기회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이 축제가 계속되는 한 언젠가는 부분적으로라도 읍성복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사창터에 자리한 청주우체국이 율량동으로 이전할 계획이라니 또한 반가운 소식이다. 읍성의 성벽 복원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성내에 있었던 관아와 사창, 충청병영에 딸린 시설들의 위치를 찾는 일부터 해야 한다. 우선 이들 역사적인 곳에 표석이라도 세우고 시유지 등 가능한 곳에는 성벽을 복원하고 정 어려우면 쌈지공원이라도 만들어서 성터를 표시하고 여유가 생기면 성문도 세워 청주의 자존심도 세워보자.
청주읍성 복원의 1등공신 박상일 박사님!
오늘 해설자로 나오셔 열강하시느랴 수고많으셨고
청주시민으로 뿌듯한 마음이 생기는 답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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