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선생의 사적지...
경남산청에 있는 덕천서원....
선생은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자 영남학파의 쌍벽이었죠.
두 분이 같은 해 태어나셨고 70, 72(조식)를 사셨으니 장수하신 셈이죠.
하지만 두분은 당시대 최고의 석학이시면서도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서신만 왕래하였답니다.
물론 삶도 많이 달랐지요. 이황선생은 벼슬길에 나가셨지만(나중엔 고사하고 고향에서 학문과 후학양성)
조식선생은 평생 벼슬을 하지않으시고 요즘 말로 재야 지식인이었던 셈이지요.
남명 선생은 생전에 지리산에 12번을 올랐답니다.
당시 1,500년대...지리산에 무슨 길이 있었겠습니까?
6 25 한국전쟁때도 빨치산이 숨어들었던 심심산골 지리산인데...
그것도 지인들과 몇이서 한번 산행에 며칠씩 보름넘게 유유자적 다녔답니다.
그리고 산에 다녀온 이야기 즉 산행기를 '유두류록'이라하여 남명집에 남겼습니다.
당시 지리산 여러곳, 한곳을 세번씩 간 적도 있으신데 이렇게 적어놓으셨지요.
선생이 60이 되어 지리산을 오를 수 없게되자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이곳...
지금의 시천면에 '산천재'를 세우고 지리산을 바라보며 후학을 양성하는 곳입니다.
예전에는 집안에 경사가 있으면 매화나무를 심었는데
그 고목이 지금도 '남명매화'란 이름으로 고고히 피어나고 있지요.
조식선생은 왜 지리산에 12번씩이나 올랐을까?
물론 산이 좋아서겠지요. 우리 산우님들처럼...
그리고 지리산을 오르며 산수도 보고 사람도 만나며 올바른 세상을 꿈꿨겠지요.
선생은 상소문도 여러번 올렸는데 그릇된 세상을 비판하는 바가 추상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을묘사직서인데 당시 조정에서 선생의 집에서 가까운 산청의 현감(군수)을 권하지만
이도 뿌리치며 임금께 상소문을 올린 것인데...
임금의 어미인 대비한테는 과부...임금한테는 고아...
이 글을 읽었던 당시 임금 명종은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불경죄로 다스려야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조정 신하들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충정의 말이라하였지죠.
사단칠정논쟁은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간에 전개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관한 이기론적(理氣論的)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말한다. 이황은 이(理)와 기(氣)가 시간상ㆍ공간상 분리되어 발동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고, 기대승은 이ㆍ기의 시공상의 분리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겸발설(理氣兼發說)을 주장하였다. 양자는 모두 기발(氣發)에 의한 것이라는 입장인 기발일도론(氣發一途說)을 견지한다. 하지만 남명선생은 이 논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學而時習 > 역사저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원된 청주읍성을 돌아보며 (0) | 2016.10.11 |
---|---|
1444년 세종대왕 초정약수 거둥에서 일어난 일(10/4,화) (0) | 2016.10.05 |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 윤선도& 녹우당 (0) | 2015.07.03 |
청주성 탈환기념 청주읍성큰잔치~ (0) | 2014.09.14 |
추사 '세한도'에서 배운다. 모름지기 친구란... (0) | 2013.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