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배운 그의 어부사시사...
하지만 그때는 국어선생님이 말씀해주시던 글귀의 해석을 달달 외우기만 했지.
이제 다시 그의 삶을 조명해본다.
그 당시 85세를 사셨으면 정말로 장수하셨네요. 그사이 관직도 이곳저곳 참으로 많은 자리에 앉으셨지만 당시 열세였던 남인의 대표로 서인(송시열)과 무척이나 싸우셨네. 성품이 강직하고 남과 타협을 하지않으니 정적도 많고...
26살 벼슬에 나가 성균관 유생시절부터 유배되기 시작하여 20년이 넘는 유배생활과 보길도에서 19년의 은둔생활... 관직은 고작 10년 유배 20년, 은둔 25년이라는 분도 계시네요. 거의 평생을 유배와 은둔으로 보내셨네.
그 은둔생활동안 뛰어난 문학적 기지와 음악, 풍류로 어부사시사, 고산 유고 등 남기셨으니 정철과 함께 조선시조의 쌍두마차인셈...어쩜 이웃 담양으로 유배되었던 정철의 삶과도 비슷하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가문에 태어나서 집권세력인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되었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하여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윤선도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았다.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의 한 사람으로, 서인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다.
11세부터 절에 들어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26세 때 진사에 급제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피난길에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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