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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山樂水/전남광주

보길도에서 윤선도와 송시열의 삶을 비춰보며

by 박카쓰 2015. 8. 3.

2015.8/2(일) 남도여행 둘째날 

새벽 방문이 열려있었나 모기가 들어와 잠을 깨웁니다.

5시30분 숙소 바로앞 중리해수욕장으로 나갑니다.

 

 

 

 

이른새벽 중리 은모래해수욕장...

점심때면 많은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겠지요.

 

 

 

 

오늘은 고산 윤선도의 삶을 비춰보는 날...

 

 

 

 

 

 

 

윤선도가 거처하던 살림집이자 후학을 양성하던 낙서재...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 1637년(인조 15년)에 들어와 1671년 돌아가실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윤선도의 아들 윤학관이 휴식하는 장소, 곡수당...

 

 

 

 

 

1995년경에 낙서재, 곡수당이 복원되었다하는데 썰렁하기 그지없네.

 

 

 

 

멀리 산중턱에 동천석실...

 

 

 

 

동천석실... 

 

 

 

 

동천석실에서 바라본 부용동...

그뒤로 섬의 주봉인 격자봉- 망월봉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등산길...

 

 

 

 

낙서재에서 세연정으로 고산의 삶이 이어진다. 

보길초등학교옆에 있는 세연정...

해설사를 따라 초딩학교 수학여행처럼...

 

 

 

 

와우...현판도 멋지네요.

원래 있던 세연정은 낡아서 무너졌고 1993년에 복원해 놓았단다.

 

 

 

 

세연...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

 

 

 

 

난 여행다니면 이렇게 해설사를 꼭 따라 붙는다. ㅎㅎ

 

 

 

 

세연정 앞의 소나무...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라나?

 

 

 

 

 

세연정은 부용동 정원에서도 가장 공들여 꾸며진 곳으로 담양 소쇄원, 진도의 운림산방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원림이다.

저 정자 한켠에서 무희들이 춤을 추면 저 못에 비춰진 그림자를 즐기고 연못에는 배를 띄워 돌게하고 고산이 지은 어부사시사를 부르게 하고 물론 이곳을 지나치는 주민들은 못 들어왔을 것이다.   

 

이 크고 작은 바위들이 옮겨왔다는데 어찌 운반했을꼬??

 

 

세연정 입구 코스모스밭...

 

 

 

예나 지금이나 어부들의 삶은 힘들어보인다.

다시마 가공...

 

 

 

 

 

 

 

점심먹기전 한 군데 더 들렸는데 바로 이곳...

 

 

 

글씐 바위...

 

 

 

선조~숙종조의 대유학자인 우암이 왕세자 책봉문제로 관직이 삭탈되고 제주 유배길을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을 시로 새기어 바위에 새겨 놓은 것

 

 

노화도에서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고 완도에서 여행 쇼핑을 한 후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내달려 청주로 돌아온다. 이번 여행은 모처럼 집사람과 함께 해서 여유롭고 느긋하였으며 이웃사촌인 이회장님부부, 녹원님부부와 함께해서 금상첨화였네. 게다가 산*고 함께 근무했던 박*증샘부부 반가웠고 마라톤 동우회원 이종*님이 멋진 사진도 이리 많이 찍어주시네.

 

 

 

 

 

 

 

 

이번 여행을 마치며 윤선도와 송시열의 삶을 생각해보았다. 

 

학창시절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시인이자 학자로 특히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에서 한자투가 아닌 우리말로 쉽게 풀어 자연과 어부의 소박한 삶을 노래한 시인으로 배웠다. 

 

51세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니 세상을 등지고 제주도로 가려다 풍랑에 이곳을 오게되어 아름다운 산수에 놀라  이곳에 터를 잡고 유배 20년, 은둔 19년의 삶으로 살다가 85세 이곳에서 세상을 등졌단다.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보길도 섬전체에 세연정을 비롯한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고 당쟁으로 시끄러운 세상을 떠나 자신만의 낙원을 건설한 셈이다. 

 

유배와 은거라는 삶이지만 해남윤씨 집안의 재력으로 화려한 왕국같은 삶이다. 정원을 짓고 무희를 불러 춤추고 풍악을 울리던 모습이 섬 오지에서 근근히 먹고살는 주민들의 눈에 어찌 보여졌으랴!

 

윤선도, 그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송시열...

 

송시열, 그는 왜 사약을 받았을까?

 

조선시대 최고의 석학이자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숙종의 미움을 받아 말년에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하고 그 이듬해 6월 국문에 응하고자 한양으로 오다가 정읍 객사에서 역적도 아닌데 83세의 노구로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다.   

 

아! 세상은 비정하도다!! 당신의 조부 효종과 아버지 현종의 스승이었고 재상이었던 분! 요부 장희빈의 아들 원 세자책봉을 서두른다고 이견을 냈다고 남인들의 사주도 있었지만 팔십 평생 나라의 어른이셨는데...

 

북한 김정은이가 북한 정치 경제를 이끌어온 장성택을 그것도 고모부인데 그를 공개 처형한 것이나 뭐가 다를 바 있는가?

 

그 당시 조선을 망하게 했던 사색당파...그 형성 과정은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라 사림 집단 사이의 정책을 둘러싼 정쟁이었다

 

그 면면은 이제까지도 우리사이에 흐르고있다. 정략싸움, 파벌싸움, 반대를 위한 반대...내 의견만 옳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때만 해도 송시열의 죽음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다. 2020년 8월 역사학자 이덕일의 책을 읽고 유튜브로 다시 공부하며 노론이 얼마나 많은 정적을 죽였는가를 생각해보면 그가 노론의 영수였고 그 노론이 조선 300년 지속되어 이완용까지 흘러갔으니 신권국가가 되었고 백성보다는 그들의 왕국이 되었으니 그에 대한 평가가 달리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