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금강산은 계절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며 아름답다하여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으로 배웠다. 하지만 사람마다 좋아하는 계절이 따로 있을 것이고 계절에 따라 사람마다 좋아하는 산도 다를 것이다. 그러기에 철따라 진달래꽃을 찾아 나서는 이가 있고 만산홍엽의 가을 산을 찾는 이도 많다. 그렇다면 난 눈 덮인 겨울 산을 제일로 좋아한다.
지난주처럼 칼바람을 맞아야 하고 폭설에는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때도 있기는 하지만 산 자체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겨울 산의 모습은 우리 인간더러 꾸밈없이 원초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일러주기에 충분하다. 때로는 함박눈이 내려 부끄러운 치부를 가려주기도 하고 눈밭 속에 내가 걸어온 뒤 발자국을 보노라면 서산대사님의 싯귀가 떠오른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지난 목요일 밤부터 금요일 오전 내내 장맛비 내리듯 비가 많이 내렸다. ‘여기는 비가 내리겠지만 내일 오를 남덕유산은 1,500m의 고지니 틀림없이 엄청나게 눈이 쌓일 거야.’ 그렇다면 산내음 덕유산 두더지작전(?) 대로 되어가는 셈이네.
하지만 토요일 새벽 잔뜩 흐려있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내다보니 오리무중, 온통 안개와 구름뿐이로구나. 에라,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어제저녁 늦은 술자리로 곯아떨어져있던 내게 누군가 그랬다. “하늘이 베껴지네요.” 그러면 그렇지 산내음에서 가는 산행일진데.
선상IC를 빠져나와 영각사로 향할 즈음 응달을 제외하곤 눈이 너무도 없다. 이번 겨울 들어 청주만큼도 오지 않았나 아니면 이번 비에 다 녹아내렸나? 산 여행을 떠나기 앞서 들렸던 영각사는 신라시대 고찰인데 새로 지은 건물은 기존의 고풍스런 모습과는 너무 안 어울려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이제 화장도 고치고 제62차 산행에 참가했다는 도장도 찍고 본격적인 산행을 나선다.
처음부터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길엔 겨울이 아니었다. 계곡에는 군데군데 잔설사이로 계곡물이 흘러내리고 우리들 몸에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린다. 이윽고 안부에 도착할 때 쯤 지나가는 구름 사이로 언뜻 언뜻 파아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점점 가파러 지면 철사다리가 나올 때쯤 되었다. 막 사다리로 이어질 무렵 하얀 구름사이로 철탑이 있는 중봉이 보였다.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오늘 또 한 번 운이 좋은 사람이 되었구나. 어서 올라가야지. 그래야 더 먼 곳을 볼 수 있을 테니까. 함께 가는 회원님이 묻는다. 사다리 계단이 몇 개나 되느냐고? 글쎄. 알려주면 실망할 텐데. 자그만치 700개나 된답니다.
한참을 더 올라 주위를 내려 본다. 야, 참말로 장관이로다. 구름이 내 발아래 깔려있고 저 멀리 북쪽으로는 지난 주 다녀온 향적봉, 중봉, 동업령, 그리고 가까이로는 무룡산, 삿갓봉도 “내도 여기 있소” 고개를 들며 소리친다. 이제 남쪽으로는 할미봉을 내려가는 백두대간 코스는 온통 불이 났나? 허연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요동치듯 넘어가고 동으로는 지리산으로 가는 금원산, 황석산 능선도 보일락 말락.
올해는 錢도 아끼려 비행기 안타려했는데 에구구, 올해 비행기 또 탔구나. 눈꽃, 상고대, 뭐라더라 크리스털? 이렇게 이리 저리 구름을 타고 다니는 손오공 되어 저 아름다운 산하를 요술 지팡이를 짚고 마음대로 휘 집고 다녀보는 멋만 하랴! 뭐라고요? 상쇄하고도 남는 다고요? 이빨도 안 났다고요?
남덕유산 1507m 고지에서도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바닥엔 얼은 땅이 녹아 질퍽거려 춘삼월도 저리 가라하네. 점심을 먹고 서봉으로 이어지며 그래도 이곳에 눈이 많이 내렸더군요. 푹푹 빠지는 눈밭을 걷는 맛도 즐기고 서봉 철 계단을 다시 오를 때 쯤 다들 힘들어 하시네.
“남덕유산과 서봉, 두 봉우리가 우뚝 서서 서로를 바라보니 이를 일컬어 형제봉이라고도 하지요. 형제를 낳은 여자도 있는데 이 까짓 거 배도 안 부르고 뭘 못 오르느냐고?” 옛날 어릴 적 교과서에 한밤중 볏갈이 더 많게 쌓아주는 형제지간처럼 우리들 인생도 서로 돕고 살아가면 뭐 힘들게 있으랴!
할미봉으로 치닫는 백두대간 코스는 온통 구름사이로 온갖 잡목과 산죽이 무성한 능선 길로 오르락 내리락 하산 길을 재촉한다. 육십령 쪽으로 "날 따르라“는 오늘의 산 대장 리본이 있지마는 내 몇 년 전 무척이나 고생을 해 봤고 함께 내려오는 회원님들한테도 정상부터 겁(?)을 주었는지라 오늘은 이만! 덕유교육원쪽으로 춘삼월(?) 날씨 운해 속 비행기 산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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