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최민자 수필집 「사이에 대하여」
목련꽃이 찬비에 젖고 있다. 겨우내 이날만을 기다려 왔건만 하필이면 때맞추어 비가 내린다. 17년동안 땅속에서 절치부심한 매미가 이제 막 지상으로 기어오르려 할때 하필이면 그 구간이 콜타르 공사로 막혀 버리거나, 느닷없이 날아온 축구공에서 하필이면 내 앞니가 부러져 버린 일 같은, 사는 동안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불운, 피하고 싶은 경우의 수를 하필(何必)이라 하필(下筆)한다. ...
야심 차게 공연을 준비했는데 하필이면 코로나로 관객을 만나지 못한 불운이니 오매불망 연연하는 사람의 편지를 막 펼쳐 읽으려는 찰나 하필이면 꿈에서 깨어 버리는 허망함 같은 것, 신이 서명하고 싶지 않을때 쓰는 가명이 우연이라면 신이 변명하고 싶을 때 쓰는 핑계가 하필일 것이다.
하필이란 말
김승희의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 중에서
하필이란 말이 일생을 만들 때가 있다
하필이면 왜 그날
하필이면 왜 그 배를
하필이면 왜 거기에
하필이면 왜 당신이
하필이면 왜 내가
하필이면 왜 그때
하필이면 언제 어디로 갈지 모른다
하필이면 이유를 모르고 배후도 동서남북도 모르지만
하필은 때로 전능하기도 하다
우연의 전능,
우연은 급히 우연을 조립한다
하필은 불현듯 순간의 어긋남에 불을 비춰주는 말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 잘못된 일이
하필은 기필코 하필이란 말을 물어보게 하는 말
하필은 참회도 없이 두 손을 붙들고 우는 말
하필이 쌓아올린 하필 그런 삶
하필이면
장영희
몇 년 전인가 십대들이 즐겨 부르던 유행가 중에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가사가 대충 이랬다.
“화장실이 있으면 휴지가 없고, 휴지가 있으면 화장실이 없고, 미팅에 가도 하필이면 제일 맘에 안 드는 애랑 파트너가 되고, 한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도 하필이면 그날이 정기 휴일이고” 등등 “무슨 일이든 어차피 잘못되게 마련이다” 라는 ‘머피의 법칙’을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노래에 나오는 ‘하필이면’ 이란 말은 분명히 ‘왜 나만? 이라는 의문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남의 인생은 별로 큰 노력 없이도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갈 뿐더러 가끔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 오는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내 인생만은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걸핏하면 일이 꼬이고, 그래서 공짜 호박은 커녕 내 몫도 제대로 못 챙겨 먹기 일쑤냐는 것이다.
그런데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것은 그게 내 탓이 아니라는 거다. 순전히 운명적인 불공평으로 인해 다른 이들은 벤츠 타고 탄탄 대로를 가는데, 나는 펑크난 딸딸이 고물차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가고 있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나도 ‘머피의 법칙’을 생각할 때가 많다. 한 예로 내 열쇠 고리에는 겉으로는 구별이 안 되는 열쇠가 두 개 달려 있는데, 하나는 연구실, 또 하나는 과 사무실 열쇠이다. 열쇠에 유성 펜으로 방 번호를 표시해 놓으면 그만이지만, 그러기도 귀찮고 또 그냥 재미도 있고 해서 내 방에 들어갈 때마다 둘 중 아무거나 꽂아 본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수학적으로 따져 볼 때 확률은 분명히 반반인데, ‘하필이면’ 연구실 열쇠가 아니라 거의 과 사무실 열쇠가 먼저 손에 잡혀 두 번씩 열쇠를 돌려야 하는 일이 열이면 아홉이다.
그뿐인가. ‘하필이면’ 큰 맘 먹고 세차한 날은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오고, 무엇을 사기 위해 줄을 서면 바로 내 앞에서 매진되고.
더욱이 얼마 전에는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내 어깨에 새똥이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나는 망연자실, 한동안 서서 나의 ‘하필이면’ 의 운명에 경악했다. 1천만 서울 인구 중에 새똥 맞아 본 사람은 아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텐데 ‘하필이면’ 그게 나라니!
물론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하필이면’도 있다. 남들은 멀쩡히 잘도 걸어다니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목발에 의지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펜만 잡으면 멋진 글이 술술 잘도 나오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이 막막한 글 하나 쓰면서도 머리를 벽에 박아야 하는가.
그렇다고 다른 재주가 있느냐 하면 노래, 그림, 손재주 그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재능을 골고루 나눠주신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필이면’ 나만 깜빡하신 듯하다.
언젠가 치과에서 본 여성지에는 모 배우가 화장품 광고 출연료로 3억원을 받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3억이면 내가 목이 쉬어라 가르치고 밤새워 페이퍼 읽으며 10년쯤 일해야 버는 액수인데, 여배우는 그 돈을 하루 만에 벌었다는 것이다.
그건 재능이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타고난 생김새 때문인데, 그렇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일이다.
나는 내가 잘빠진 육체는 가지지 못했어도 그런대로 꽤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내 아름다운 영혼에는 3억 원은커녕 3백 원도 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둘 다 못 가지고 태어날 바에야 아름다운 몸뚱이를 갖고 태어날 일이지 왜 ‘하필이면’ 3백 원도 못 받는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태어났는가 말이다.
그래서 ‘하필이면’ 이라는 말은 내게 한심하고 슬픈 말이다.
그런데 어제 저녁 초등학교 2학년짜리 조카 아름이가 내게 던진 ‘하필이면’ 은 전혀 그렇지 않다. 길거리에서 귀여운 팬더 곰 인형 하나 사서 아름이에게 갖다 주자 아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데 이모, 이걸 왜 하필이면 내게 주는데? 하는 것이었다. 다른 형제나 사촌들도 많고, 암만 생각해도 특별히 자기가 받을 자격도 없는 듯한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는 아름이 나름대로의 고마움의 표시였다.
외국에서 살다 와 우리말이 아직 서투른 아름이가 ‘하필이면’ 이라는 말을 부적합하게 쓴 예였지만, 아름이처럼 ‘하필이면’을 좋은 상황에 갖다 붙이자, 나의 ‘하필이면’운명도 갑자기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누리는 많은 행복이 참으로 가당찮고 놀라운 것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기에,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내가 훌륭한 부모님 밑에 태어나 좋은 형제들과 인연 맺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있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무슨 권리로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없이 편하게 살고 있는가.
또 나보다 머리 좋고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똑똑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게다가 실수투성이 안하무인인데다가 남을 위해 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 장영희를 ‘하필이면’ 왜 많은 사람들이 도와 주고 사랑해 주는가(우리 어머니 말씀으로는 양순하고 웃기 좋아하는 나의 성격 때문이라는데, 그렇다면 잘빠진 육체보다 아름다운 영혼을 타고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필이면’ 의 이중적 의미를 생각하니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남의 짐보다 무겁다고 아우성쳤던 좁은 소견이 새삼 부끄럽다.
창문을 여니, 우리 학생들이랑 일산 호수공원에 놀러 가기로 한 오늘, ‘하필이면’ 날씨가 유난히 청명하고 따뜻하다.
장영희 (1952-2009) 서울 출생. 영문학자.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2009년 대한민국 장애인 예술문화 대상 수상. 수필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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