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시인 미디어카페 다독다독...
8월11일(목) 오후5시
그럴때가 있다 - 이정록 시인
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트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서 사나흘 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ㅡ 시집『그럴 때가 있다』(창작과비평사, 2022)
꼬마 선생님
수업을 마치고 화장실에 들렀는데
문 뒤로 아이가 숨는 게 보였습니다.
고둥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했습니다.
조개 캐러 나간 할머니가 곧 오실 거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꼭 쥐고 있던 토막 연필을 내게 주었습니다.
무지갯빛 지우개가 가까스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외로움과 막막함과 슬픔이 물어뜯겨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새것이에요.
―고맙다. 나에게 주는 거니?
―이걸로 재미난 글을 써주세요.
눈보라 속에서 아이의 하나뿐인 가족이
함박눈을 지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외톨이 늙은 개가 운동장을 질러 달려갔습니다.
선생님, 잘 쓰겠습니다.
나는 갓 등단한 어린 작가가 되어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고드름처럼 울었습니다
「꼬마 선생님」 中
등
암만 가려워도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
첫애 업었을 때
아기 입술이 닿았던 곳이다
새근새근 새털 같은 콧김으로
내 젖은 흙을 말리던 곳이다
아기가 자라
어딘가에서 홧김을 내뿜을 때마다
등짝은 오그라드는 것이다
까치발을 딛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손차양하고 멀리 내다본다
오래도록 햇살을 업어보지만
얼음이 잡히는 북쪽 언덕이 있다
언 입술 오물거리는
약숟가락만 한 응달이 있다
(이정록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창비, 2002)
장어
어머니는
눈곱만큼이라도 맘에 들면
장허다! 참 장허다! 머릴 쓰다듬었다.
나는 정말 한 마리
힘센 장어가 된 듯했다.
털끝만큼이라도 성에 차지 않을 때도
장허다! 참 장허다! 돌아앉았다.
나는 정말 먼 바다
길 잃은 어린 장어 같았다.
어른이 된 나는 언제
꿈틀꿈틀 장어가 되는가.
미끈둥한 시 한 편 쓰면
나는 장어구이 집에 간다.
부끄러워 고개 들 수 없을 때도
장허다! 소주잔에 눈물 빠트리러
꼬리치는 장어구이 집에 간다.
먼바다 끄트머리 우뚝한 섬,
어머니에게 바닷길을 여쭈러 간다.
어머니는 언제나
참 장허시다!
진달래꽃
그럭저럭 사는 거지.
저 절벽 돌부처가
망치 소리를 다 쟁여두었다면
어찌 요리 곱게 웃을 수 있겠어.
그냥저냥 살다 보면 저렇게
머리에 진달래꽃도 피겠지.
[이전 포스팅 2022.1.11]
고딩친구들과의 문학사랑방 '구인회' 카톡방에 이런 시가 떠올랐다.
시(詩)
<정 말>
이 정 록/충남고교 교사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 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 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 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박카스가 댓글을 달았다. "외설아니야?"
이종*시인이 소개한다. "이정록 시인은 다작을 하면서도 시를 읽도록 재미있게 쓰는 시인으로 한문교사인데 말솜씨도 기막히게 좋아 마치 코미디언 보는듯 해요."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어라? 박카스랑 명문사대 동문이네요. ㅎㅎ
* 1964년 충남 홍성 홍동면 대영리에서 출생.
* 공주사범대학 한문교육과 졸업.
*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혈거시대〉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 시집으로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문학동네, 1994),『풋사과의 주름살』(문학과지성사, 1996)
『동심언어사전』, 『시인의 서랍』
* 박재상문학상,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수상.
그의 시를 읽어보았다.
별/이정록
네모 안에 동그라미를 넣는 방법은?
이슬이 잘 알지.
아침마다 이슬은
거미줄 네모 칸에 들어갔다가 나오니까.
동그라미 안에 네모를 넣는 방법은?
그건 모두가 잘 알지.
둥근 마음에 미움을 품는 거지.
뾰족한 모서리는 빠져나가지도 않지.
그럼 동그라미 안에 별을 넣는 방법은?
그건 네가 잘 알지.
네 동그란 눈망울에는
늘 별이 떠 있으니까.
성행위/이정록
꿈을 적어보라고 했다
머리를 긁적이다가
쑥스러워서 한 손으로 종이를 가렸다
성
행
위
아버지가 다짜고짜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뭘 잘했다고 식식거리냐고 화를 냈다
머리를 문지르려고 팔을 들어 올리자
나의 당찬 미래가 드러났다
성장하는 나
행동하는 양심
위로할 줄 아는 어른
시-어머니학교 10/이정록
시란 거 말이다
내가 볼 때, 그거
업은 애기 삼 년 찾기다.
업은 애기를 왜 삼 년이나 찾는지
아냐? 세 살은 돼야 엄마를 똑바로 찾거든.
농사도 삼 년은 부쳐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며
이 빠진 옥수수 잠꼬대 소리가 들리지.
시 깜냥이 어깨너머에 납작하니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너를 엄마! 하고 부를 때까지
그냥 모르쇠하며 같이 사는 겨.
세쌍둥이 네쌍둥이 한꺼번에 둘러업고
젖 준 놈 또 주고 굶긴 놈 또 굶기지 말고.
시답잖았던 녀석이 엄마! 잇몸 내보이며
웃을 때까지.
이 웃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울어대는
학교 종 한번 꺼달란 적 있어
학교 옆에 사는 사람은 두부도 먹지 말란 거여
꽁치며 갈치며 비린 것 한번 맛볼라치면
버스 타고 장에까지 갔다오란 거여
차비는 학교에서 내줄 거여. 도대체
생명이 뭔지나 알고 분필 잡는 거여
호박넝쿨 몇개 얹었더니 애들 퇴학시키듯 다 잘라버린 것들이
말 못하는 담벼락 가슴팍에 못질까지 하는 거여
애들이 뭘 보고 배울 거여. 이웃이 뭔지
이따위로 가르쳐도 된다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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