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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時習/My Essay

손톱을 물들이며

by 박카쓰 2021. 7. 18.

  친구네 새 아침 농장에 봉선화가 참 많이 피어있다. 봉선화를 보니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른다. 꽃이 드물던 내 시골마을에도 한여름엔 울타리나 장독대에 봉숭아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여자애들은 너도 나도 손톱에 봉숭아꽃을 물들여 학교에서 자랑을 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도 봉숭아꽃을 따다가 손톱에 물들여보고 싶었다.

 

  하지만 머슴애가 계집애처럼 물들였다고 놀림 받을까 봐 감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놈의남녀칠세부동석은 꼬마 때부터 남녀를 갈라놓았다. 남녀 놀이도 달랐고 학급도 학교도 달랐다. 어쩌다 여자에게 말을 붙이기라도 하면 연애질한다는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니 봉숭아꽃 물들이기는 언감생심이었다.

 

  결혼하고 나서야 아내와 같이 손톱에 봉숭아꽃으로 물들여보기 시작했다. 7월에 물들인 손톱이 자라면서 그 자국이 없어질 때면 벌써 가을이 성큼 와 있었고 이번 여름도 잘 지냈다싶어 기분이 좋았었다.

 

  오늘 새벽 일어났더니 내 오른손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비닐 위생장갑으로 씌어있었다. 어젯밤 내가 잠든 사이 아내가 봉숭아물을 들여놓은 것이었다. 벗겨내니 손톱 뿐 아니라 손에도 물이 들어있었다. 실로 묶지 않고 엉성하게 해놓은 것이었다. 차라리 깔끔한 것보다 더 좋았다. 아내는 명반이나 소금을 넣었으면 더 잘 들었을 거라며 아쉬워한다.

 

 동시(童詩) 작가 유영철 님도 어릴 때 손가락에 봉선화 물을 들였나보다.

 

외할머니 댁 토담 아래 핀 봉선화

막내 이모 입술보다 더 붉다.

 

봉선화 꽃잎 한 줌 따서 돌로 콩콩

외할머니 사랑 한 줌 따서 돌로 콩콩

 

열 손가락 위에 봉선화 올려놓고

뽕잎으로 꽁꽁 묶어두면

 

손톱에는 이모 입술이 묻어 있다.

외할머니 사랑이 묻어 있다.

 

  봉선화를 볼 때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초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웠다. 그러면서 이 노래가 우리 민족이 일제하에서 수난을 겪던 시절 울 밑에서 선 봉선화가 우리 민족을 상징한다고 배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노래를 부르니 왠지 슬펐다. 어린 마음에도 나라 잃은 설움이 복받쳤나 보다. 다시금 불러본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 너를 반겨 놀았도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이자 최초의 저항 동요란다. 작곡가 홍난파의 처녀작이고 소프라노 김천애는 대중 앞에서 이 노래를 불러 옥고를 치렀단다.

 

  갑자기 아내가 묻는다. “봉숭아가 맞는 거야? 봉선화가 맞는 거야?”그러게. 얼른 검색해보았다. 원래 봉선화였는데 대중들 사이에서 부르기 쉽게 봉숭아라 불리게 되었고 봉선화봉숭아둘 다 표준어로 허용하고 있단다. 그리고 봉선화는 원래 우리나라 자생종이 아니고 인도, 말레이시아, 중국 남부가 원산지이고 꽃 색도 홍색, 백색, 자색 참 다양했다. 봉선화의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Touch-me-not).‘ 이었다. 씨앗 꼬투리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씨앗들이 터져 나가기 때문이란다.

 

  놀랍게도 봉선화가 영어로 임파첸스(Impatients)이다. 'Impatient''참을 수 없는' 이라는 뜻인데 이는 씨앗이 참지를 못하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태양의 꽃으로 불리는 산파첸스(Sunpatients)Sun(태양) + Patients(인내심)으로 한여름의 더위나 강한 햇빛에도 잘 견디며,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물들여 보았을 봉숭아꽃, 올여름이 가기 전에 손가락에 물들이며 옛 추억에 잠겨보면 어떨까? 그 봉숭아물이 없어질 때쯤이면 서늘한 가을에 이미 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