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學而時習/역사저널

임진왜란의 영웅, 동래부사 송상현&충렬사

by 박카쓰 2021. 3. 3.

송상현 충렬사가 있는 강촌마을... 

학창시절부터 수없이 이곳을 지나다녔다.

오늘은 임진왜란때 동래성전투에서 순국한 송상현의 묘가

왜 이곳에 있을까 궁금증을 찾아나섰다. 

 

이 마을은 강상촌마을이었는데 요즘 강촌마을로 불리운다. 

송상현 묘가 이곳으로 이전함에 따라 그의 후손들이

이 곳에 살게되어 지금은 여산송씨 집성촌이 되었단다. 

 

여산 송씨 정려각, 이승만대통령의 기념식수

 

 

부모산 산행을 마치고 이쪽으로 하산하며

먼저 묘소와 신도비에 들렸다. 

 

 

신도비...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비는 뿌리지만 계단을 따라 오른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선생의 묘....

 

 

선조 28년에 명나라 지관의 말에 따라 부산 동래에서 이 곳으로 이장하였다.

 

 

충렬사에 왔다. 

충렬사는 임진왜란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국가의 위난을 죽음으로 지켜 시호를 '충렬'이라 하였다. 

 

 

 

향을 피우고 묵념을 하며 선생의 뜻을 기렸다.

 

 

임진왜란의 영웅
송상현, 조헌, 고경명,이순신, 이항복, 윤두수,정곤수,류성룡,권율  

 

정곤수는 잘 못들어봤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신하는 선조를 호종했다. 지돈녕부사로서 진주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한 공으로 이듬해 판돈녕부사가 되었으며 대명외교에 힘썼다. 

 

 

아! 송상현!!

1592년 5월 2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 다음날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이어 동래에 쳐들어온 왜병이 남문루 밖에 목패를 세우고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달라" 라고 하자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고 하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했다.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려한 송상현과 민관군들

 

송상현 부사는 군사를 이끌고 분전하였으나 결국 중과부적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북쪽의 임금께 절을 올린 후 부친에게 “달빛에 비추인 외로운 성은 줄지어 선 군진을 높은 베개로 삼았고, 군신의 의리가 무거움에 부자의 은혜는 오히려 가벼운 듯 하구나[孤城月暉列陣高枕 君臣義重父子恩輕]”라는 글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적장 소 요시토시등이 그의 충절에 탄복하여 동문 밖에 장사를 지내주었다.

 

 

 

孤城月暉列陣高枕 君臣義重父子恩輕

송상현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었다. 글귀가 남다르다. 

 

동래부순절도...

1658년 동래부사 민정중이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다.

 

1658년 그림을 바탕으로 1709년에 그린 그림

 

 

 

 

성문이 뚫리자 관백을 입고 왕에게 절을 올리는 동래부사(지금으로는 부산시장?) 송상현의 숭고한 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송상현은 왕에게 절을 하곤 다시 싸우러 나가 왜군에 살해되었다.

가운데 붉은 조복을 입은 송상현

 

부녀자들...어찌 기륵하지 않으리오. 

 

 

하지만 나라의 녹봉을 먹는 장수가?? 
하루의 힘도 바치지않고 잠시 동안의 삶을 내기하였는가!

경상좌변사 이각이라네. ㅠ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당당히 싸워 한번의 죽음으로 영원히 살 수 있을까?

충렬공 송상현의 의로운 죽음에 고개가 절로 죽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