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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時習/내 문인화

[묵죽] 어느 대나무의 고백-복효근

by 박카쓰 2020. 11. 13.

사군자는 매화·난초·국화·대나무 등 네 가지 식물을 일컫는 말로 고결함을 상징하는 문인화의 화제로 사용되고있다. 

매화는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운다.

난초는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국화는 늦은 가을에 첫 추위를 이겨내며 핀다.

대나무는 모든 식물의 잎이 떨어진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한다

각 식물 특유의 장점을 군자(君子), 즉 덕(德)과 학식을 갖춘 사람의 인품에 비유하여 사군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시인이 바라보는 대나무는 달랐네. 

 

어느 대나무의 고백 (복효근, 1962~)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 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있는 것이다

 


   - 2006년 시집 <어느 대나무의 고백> (문학의 전당)

 

복효근의 시로 화제를 써보았네요. 왼쪽은 인당선생님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