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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時習/역사저널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

by 박카쓰 2020. 9. 2.

2014.4/26 진안 천반산을 다녀오며 우리역사의 왜곡에 크게 놀랐다. 

 

천반산은 선조 22년(1589년)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 차별의 분수령을 이룬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주인공인 조선중기 사상가 정여립(1546~89)의 한(恨)이 서려 있는 곳이다. 

 

정여립이 누구지? 왜 난을 일으켜?? 못된 사람...

그당시만 해도 모두가 난이었다.

묘청의 난, 홍경래의 난, 동학마저도 동학란

 

그 억울한 한이 서려있는 정여립을 공부해보았다.

 

천반산은 선조 22년(1589년)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 차별의 분수령을 이룬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주인공인 조선중기 사상가 정여립(1546~89)의 한(恨)이 서려 있는 곳이다. 정여립은 전주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15세에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정도로 영민하였고, 선조 3년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이라는 벼슬에 올랐으나 그의 스승인 성호 이이가 죽자 서인(西人)에서 동인(東人)으로 옮겨가면서 서인을 비판하게 되었고, 이것이 선조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된 까닭이었기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게 된다. 

정여립의 이러한 변신은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사회에서 반역자적인 의미를 지니게 됨에 따라 부정적인 시각이 대세를 이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정여립은 모악산 앞 제비산에 머물면서 죽도(竹島)에 서실을 짓고 강론을 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며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다. 신분의 제약이 없는 이러한 조직은 급속도로 호남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이러한 영향은 1587년 손죽도를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던 중 1589년 10월,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 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그가 대동계 사병을 이끌고 도성으로 와서 선조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고 고변(告變)하였다. 선조는 이들의 세력이 막강함을 우려하여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관련자 80명이 압송되었으며 점차 범위가 확대되어 2년간 국문장이 열렸다. 옥사는 1천명의 희생자를 냈다. 당시 형문을 담당하던 위관은 송강 정철이었다 한다. 

그런데 정여립의 죽음과 관련해 의견이 분분하게 나뉜다. 천반산에서 자살을 했던 것인지 단순히 죽도를 방문했다가 관군에게 잡혀 죽었던 것인지에 대해선 기록이 제각각이다. '동서만록'에 따르면 정여립은 평소에 천반산 아래 죽도를 자주 찾았기에 그를 죽도선생이라 불렀다고 하며, 더욱이 역적도 아니었기 때문에 죽도로 피난 간 것이 아니라 평소처럼 죽도의 비경을 즐기려고 나왔다가 관군에게 잡혀 억울하게 죽었을 뿐 자살로 조작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만을 남긴다고 했던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학창시절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공부하며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알던 정철!

송익필과 더불어 동서인을 가르고 남을 고문하던 모진 분이셨던가? ㅠㅠ 

 

그 당시 선비와 무고한 사람들을 1,000명넘게 죽였으니 민심이 흉융했고

조정 대신들은 동인 서인 당파싸움에 몰두하다보니 국력은 뿔뿔이 나뉘고  

몇년후 임진왜란에서 의심많았던 선조는 제 몸 피신하기에 바빴고

길잃은 백성들은 왜군에 처참히 밟혔을 것이다.

 

 

그의 삶이 재조명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