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學而時習/역사저널

의병대장 김덕령& 그의 매형 김응회

by 박카쓰 2020. 9. 3.

2016.11월 무등산을 다녀오며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모시는 충장사에 들립니다.

 

 

의병대장 김덕령...

당시 이순신장군과 버금가는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29살의 나이에 옥사했다.

 

고등학교때 그의 시를 배웠다.

 

'춘산곡'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핀 꽃 다붙는다.

저뫼 저불은 끌물이야 있거니와

이몸에 내없는 불 일어나니 끌물없어 하노라.

 

 

임진왜란때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가고

신하를 못믿어 이순신을 잡아가두고 김덕령도 죽였으니...

 

예전 왕이나 지금의 대통령이나 제 역할을 못하네. 

충장사앞에서 참배를 드리고 넋을 위로해본다.

 

우리역사에 김덕령장군이 많이 알려지지않아 안타깝다.

 

 

김덕령 장군은 광주시 충효동에서 1567년 광산 김씨 가문 붕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글을 배워 장성하면서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송강 정철과 함께 수학하였다. 1592년(宣祖25년)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兄)덕홍(德弘)과 함께 의병활동에 참가하였다. 이 때 형 덕홍은 의병장 조헌이 이끈 금산싸움에서 전사하였으며, 장군은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등의 천거로 선조로부터 형조 좌랑의 벼슬을 받았다. 

1593년 담양지방에서 의병 5,000여 명을 이끌고 출정하니 나라에서는 장군을 선전관으로 임명하고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號)를 내렸다. 1594년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진해, 고성에서 왜군을 방어했으며, 장문포 싸움에서는 충무공 이순신과 수륙연합전으로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1595년에는 고성에 상륙하는 왜군을 기습 격퇴하여 큰공을 세우니, 선조로부터 충용장이란 군호를 받았다. 1596년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던 중 모함으로 투옥돼 갖은 고문 끝에 그 해 9월 15일 29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1661년(헌종2년)에야 공의 억울함이 조정에 알려져 관직이 복직되고, 1668년 병조판서에 가증, 영조때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으며 1788년 정조 대왕은 장군께 충장공(忠將公)의 시호를 내렸으며, 장군이 태어난 마을 석저촌을 충효의 고을이라 하여 충효리(忠孝里)로 바꾸도록 하였다.

 

 

10일후 이번에는 추월산을 내려오며

김덕령장군의 흥양이씨 부인를 추모하는 비가 있습니다.  

 

 

 

형은 금산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고

김덕령장군의 부인은 왜적에 쫓기다 이곳에서 몸을 던졌으니...

 

 

동학혁명때 일본군과 맞서 싸운 의병전적지를 들리며 또 숙연해집니다.

일본군 100여명과 끝까지 싸우다 최후를 마친 15명 의병들...

 

저 추모비는 김덕령장군의 매형 김응회와 모부인 창령 성씨 순절비

김응회도 신라왕족의 자손으로 처남 김덕령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왜병에게 쫒겨 모자가 함께 이곳 절벽에서 몸을 던집니다.   

 

[인물탐구] 이번에는 김응회를 공부해봅니다.

 

청계공(淸溪公) 휘(諱) 응회(應會) 창의장(漲義將)

1555(명종 10)∼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언양(彦陽), 호는 청계(淸溪).

 

김덕령이 이몽학(李夢鶴) 의 난에 반역죄로 연루되었을 때 김응회도 함께 붙잡혔는데,

그는 혹독한 고문을 겪으면서도 처남 김덕령 의 충성스러움을 주장하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에서 왜적을 막다가 순국하였다.

이때 어머니와 김덕령의 부인 흥양이씨(興陽李氏) 도 함께 순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