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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時習/역사저널

대유학자 송시열? 알고보니 신화였다.ㅠㅠ

by 박카쓰 2020. 9. 2.

2015년 여름 보길도를 다녀오며 고산 윤선도의 삶을 생각해보았다.

 

학창시절 송강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시인이자 학자 특히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에서 한자투가 아닌 우리말로 쉽게 풀어 자연과 어부의 소박한 삶을 노래한 시인으로 배웠다.

 

고산은 서인(西人) 송시열과 동시대를 살며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다. 51세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니 세상을 등지고 제주도로 가려다 풍랑에 이곳을 오게되어 아름다운 산수에 놀라  이곳에 터를 잡고 관직 10년, 유배 20년, 은둔 19년의 삶으로 살다가 85세 이곳에서 세상을 등졌단다.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짓고...보길도 섬전체에 세연정을 비롯한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고 당쟁으로 시끄러운 세상을 떠나 자신만의 낙원을 건설한 셈이다.

 

유배와 은거라는 삶이지만 해남윤씨 집안의 재력으로 화려한 왕국같은 정원을 짓고 무희를 불러 춤추고 풍악을 울리던 모습이 섬 오지에서 근근히 먹고살는 주민들의 눈에 어찌 보여졌으랴!

 

 

그리고 여행 막바지에 글씐 바위에 들렸다. 그런데 그곳에 정적이었던 우암 송시열의 유적이 있었다. 

 

글씐 바위...

 

선조~숙종조의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왕세자 책봉문제로 관직이 삭탈되고 제주 유배길을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을 시로 새기어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내고장 최고의 인물이라면 우암 송시열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시대 최고의 석학이자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숙종의 미움을 받아 말년에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하고 그 이듬해 6월 국문에 응하고자 한양으로 오다가 정읍 객사에서 역적도 아닌데 83세의 노구로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다.   

 

아! 세상은 비정하도다!! 당신의 조부 효종과 아버지 현종의 스승이었고 재상이었던 분! 요부 장희빈의 아들 원 세자책봉을 서두른다고 이견을 냈다고 남인들의 사주도 있었지만 팔십 평생 나라의 어른이셨는데...

 

"북한 김정은이가 북한 정치 경제를 이끌어온 장성택을 그것도 고모부인데 그를 공개 처형한 것이나 뭐가 다를 바 있는가?" 라며 송시열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그가 사약을 받고 죽는 장면에서 엇갈린 기록이 내려온다. 뭐지?

 

 

그 당시 조선을 망하게 했던 당파싸움...그 형성 과정은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라 사림 집단 사이의 정책을 둘러싼 정쟁이었다. 그 면면은 이제까지도 우리사이에 흐르고있다. 정략싸움, 파벌싸움, 반대를 위한 반대...내 의견만 옳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반전]

우리고장에 우암 송시열의 유적이 많아 별다른 이의없이 받아들였는데 2020.8월말 요즘 유튜브로 역사를 공부하며 송시열이란 인물을 다시 생각해본다. 

 

 

 

화양동에 있는 유적 안내...

 

잘못된 역사...
중국 청나라의 무력에 굴하지않는 민족자존 정신? 아니었다.

악대설화...효종은 양병(養兵)에 치중한 북벌 방책을 토로했으며, 송시열은 원칙론을 내세워 격치성정(格致誠正)과 양민(養民)을 강조하였다. 북벌의 뜻이 없었다. 북벌은 오히려 정적이었던 윤휴가 주장했다.

 

반청애국사상의 단면을 보여주고있다? 무슨 애국인가? 성리학(주자학)만이 옳고 친명배금정책으로 망한 명나라를 숭상하여 대의명분에 치우친 실리를 외면한 어쩌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왜곡되고 파괴당하는 수난? 
노론의 영수로 노론이 왕보다 더 득세하여 수많은 정적을 죽였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그 원한으로 죽게되었고 그래서 역사의 평가도 달리되고 있는 것이다.  

 

 

[유튜브 어느 분의 댓글]

성리학의 본고장이라고 할수있는 중국에서 조차 다른 학문을 수용하는 것에 대해 유연했는데 조선만 고집스럽게 성리학을 고수하다가 망국의 길을 걸었습니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의 재상들에게 성리학의 수명이 다했다며 다른 학문과 사상의 유연한 수용을 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란.호란 양난후 무너진 신분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양반들의 계획에 따라 더욱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강조하는 사회로 고착되고 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런 결과는 결국 세계의 근대화의 흐름에 뒤쳐지게 되고 종국에는 조선이 열강들의 이권다툼의 각축장으로 전락해버리는 비극적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난 대원군의 쇄국정책때문에 조선의 발전이 늦어지고 결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게되었다고 배웠는데...도대체 우리는 학창시절 역사를 어떻게 배웠나?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하고 헛된 것을 알고있는 내 지식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에구구...열불이 나서 이 책은 못 읽을 듯...

 

 

 

사문난적으로 죽임을 당한 윤휴...

윤휴는 송시열과 같은 시기에 태어났지만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려 결국 사약을 받았다. 사문난적이라는 단어는 고대 중국에서 사이비 학문으로 궤변을 펼치는 변설가들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성리학 이외에 다른 학문을 연구하거나 그도 아니면 자신과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을 매장시키기 위한 의도로 사용되었다.

 

 

아무리 다른 당파라도 공작 정치로 무고한 남인들을 죽음으로 몬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서인들이 소론이 되고, 정치 공작을 옹호한 서인 중진들이 노론이 되었다. 이후에도 노론은 자신들과 다른 정견을 가진 국왕 경종을 독살하고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등 정치 공작을 자행했다. 그러면서 윤휴의 북벌론을 송시열 등이 장한 것으로 역사 바꿔치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노론은 조선이 멸망할 때는 일제에 가담했다. 그렇게 지금도 국사 교과서는 북벌의 자리에 윤휴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송시열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윤휴는 그렇게 사망 3백년이 지난 지금도 지워진 이름이 되었다.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고 있는 우리 시대는 그를 살해했던 시대보다 나은가, 윤휴는 지하에서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