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淘河)와 청장(靑莊)’
박 해 순
지난 주 평생교육원에서 수필 창작을 공부하면서 수필은 작가와 독자사이에 가장 가까운 대화로 아무리 기품이 있고 차원 높은 내용도 설교, 주장, 논쟁, 전문적 지식에 머물면 공감을 얻지 못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주제를 선택해야한다고 배우면서 ‘도하(淘河)와 청장(靑莊)’ 이라는 수필의 일부가 인용되었다.
고사성어가 그렇듯이 짧은 말이지만 함축적인 의미와 지혜로움이 담겨있기에 그 오묘한 뜻을 살펴보려고 인터넷으로 검색하였더니 출처가 불분명한 것도 있고 이를 해석하는데 지난 수필시간 키워드였던 ‘의미의 오류’가 발생하는 것 같아 오늘 질문으로 가져왔습니다.
먼저 책 「좋은 수필 창작론」 p.95에 나오는 박종화, 「도하와 청장」 일부는 노산 이은상의 수필로 한국 대표수필 100선에도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도하(淘河)와 청장(靑莊)’ 그 의미를 살펴봅니다.
[인용]
세상에 가장 가련[可憐]한 것은 일하고도 먹지 못하는 것이요, 그 대신에 가장 가증[可憎]한 것은 놀고도 잘 먹는 것이다. 인간의 온갖 불평과 눈물의 반 이상이 여기에서 연유함이라 하여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淘河勞而常飢 靑莊失而常飽(도하노이상기 청장실이상포) 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淘河는 애를 쓰고도 늘 주리는데 靑莊은 놀면서도 늘 배불리 먹는 다는 말이다. 여기에 淘河와 靑莊이라는 것은 다 물새들의 이름이다. 淘河란 것은 속명으로[사다새]이니, 이 새는 하루 종일 고기를 엿보며 강물의 뻘흙 속을 다니면서 날개와 입부리를 더럽혀가며 고기를 찾느라고 애를 쓴다. 그러나 꾀 많은 고기들은 淘河의 그림자를 피하여 물가로 숨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靑莊은 항상 물가에서 멀쑥하니 서서 밖으로는 한가로운 척 아무것도 구하는 것이 없는 듯이 보이나 淘河에게서 쫓겨 물가로 숨어 나오는 고기들을 아무런 수고도 없이 날름날름 배부르게 잡아먹는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일찌기 淘河와 靑莊을 세간이욕인[世間利慾人]에게 비겨 말해 온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이 ‘도하와 청장’이 요즘 말하는 ‘수저론’과 흡사하다. 淘河는 흙수저이고 靑莊은 금수저인 셈이다. 淘河는 기를 쓰고 노력해도 공정한 기회마저 박탈당한 일반 서민들을 말함이요 靑莊은 부모의 후광을 배경삼아 고생 없이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옛말이 되고 금수저는 금수저를 낳고 흙수저는 흙수저를 낳는다는 세간의 말속에서 우리사회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두 번째로 수필가 정민 교수님은 조선일보에 세설신어로 도하청장(淘河靑莊)을 내걸었다.
[인용]
연암 박지원의 담연정기(憺然亭記)에 도하(淘河)와 청장(靑莊)이란 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둘 다 물가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새다. 먹이를 취하는 방식이 특이하다. 도하는 사다새다. 펠리컨의 종류다. 도(淘)는 일렁인다는 뜻이니 도하는 진흙과 뻘을 헤집고 부평과 마름 같은 물풀을 뒤적이며 쉴 새 없이 물고기를 찾아다닌다. 덕분에 깃털과 발톱은 물론 부리까지 진흙과 온갖 더러운 것을 뒤집어쓴다. 허둥지둥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종일 물고기 한 마리 못 잡고 굶주린다.
청장은 해오라기의 별명이다.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린다. 이 새는 말고 깨끗한 물가에 날개를 접은 채 붙박이로 서 있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좀 채 옮기는 법이 없다. 게을러 꼼짝도 하기 싫은 모양으로 마냥 서 있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희미한 노랫가락에 귀를 기울이듯 아련한 표정으로 수문장처럼 꼼짝 않고 서 있다. 물고기가 멋모르고 앞을 지나가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날름 잡아먹는다.
도하는 죽을 고생을 해도 늘 허기를 면치 못한다. 청장은 한가로우면서도 굶주리는 법이 없다. 연암은 이 두 가지 새에 대해 설명한 후 이것을 세상에서 부귀와 명리를 구하는 태도에 견주었다. 먹이를 찾아 부지런히 쫓아다니면 먹이는 멀리 달아나 숨는다. 욕심을 버리고 담백하게 있으면 애써 구하지 않아도 먹이가 제 손으로 찾아온다. 권력이든 명예이든 쟁취의 대상이 되어서는 내 손에 들어오는 법이 없다. 갖고자 애쓸수록 멀어진다. 담백한 태도로 신중함을 가지고 희로애락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때 보통 사람들이 밤낮 악착스레 얻으려 애를 쓰면서도 얻지 못하는 것들이 저절로 이른다.
박지원에게 이 설명을 듣고 이덕무(실업사상가)는 청장이란 새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청음관(靑飮館)이라고 쓰던 자신의 당호를 당장 청장관(靑莊館)으로 고쳤다. 신천옹, 하늘을 믿고 작위하지 않는 청장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없어도 그만이다. 조금이면 만족한다. 그런 마음속에 넉넉함이 절로 깃든다. 아등바등 욕심만 부리면 먹을 것도 못 얻고 제 몸만 더럽힌다.
사실 우리네 인생이 이렇다는 것은 우리 모두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돈 좀 더 벌어 보려다보면 사람이 옹졸해지고 남보다 높이 올라가려다 보면 사람이 비굴해지고 돌아설 때면 내 자신이 초라함을 느끼게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많은 돈과 권력을 쌓은 사람들이 비리를 저지르고 줄줄이 구속되는 모습을 보면 과연 부귀영화의 끝은 있는 걸까 생각해본다.
부처님께서도 젊은 시절에는 낙을 추구했단다.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쾌락주의를 따라갔단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단다. 더 큰 불꽃은 더 많은 장작을 요구하듯이 끝없이 커지는 욕망의 성질을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욕망의 씨를 잘라버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욕망을 없애버리고자 고행주의를 따랐던 것이다. 우리도 이 욕망을 놓아버림으로써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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