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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山樂水/전라북도

진안 천반산, 깎아지른 절벽 그리고 정여립을 생각하며(14.4/26,토)

by 박카쓰 2014. 4. 27.

세월호의 안타까움과 추모의 분위기속에 많은 행사가 잇달아 취소되고있다.

나도 문경휘호대회를 앞두고 산행을 접고 휘호연습에 몰두하려했는데...

 

 

 

어쨌든 신록의 봄내음을 맡으러 좋아하는 산행을 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2011년 이맘때 토요산악회를 따라 선운산을 따라 갔는데 이번이 두번째...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서 출발지인 용암현대까지 걸어서 20분, 편리하네.

 

금산인산랜드 휴게소에 함께 산행가는 김수석 금산을 만나고  ㅎ

산행기점에서는 평산회 이형님을 뵙고...ㅎㅎ

09:30 산행기점에 도착, 몸풀기를 한 후  산행을 시작한다.

 

 

 

2011.4.23 토요산악회따라 선운산ㅎㅎ

3년전에도 역시 노오란 색 자켓...ㅋㅋ

 

 

 

오늘 걸어온 길...

09:30 등산 시작 - 14:20 산행 완료,   널널한 5시간 산행

 

 

 

김수석과 고사리뜯으며 신록예찬 쏟아놓다가 늦어지고...

 

 

 

급기야 호출받고 부랴부랴 ㅎㅎ

 

 

 

 

천반산 성터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산위가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고 하여 이름 붙은 천반산은 남쪽은 장수에서 흘러내리는 장수천과  동쪽 덕유산에서 시작된 구량천이 巴자형으로 굽이쳐 흐르다. 한머리 금강으로 거듭나는 것을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다. 땅에는 天盤, 地盤, 人盤의 명당자리가 있는데 이곳은 천반의 명당이 있다하여 천반산이라고 이름이 지어졌다한다. 천반산은 사방이 깍아지른 듯한 험준한 지세위에 정상은 약 10,000여평의 평지가 소반처럼 자리한 천혜의 요새이다. 

 

 

천반산 정상인 깃대봉...

우리는 대한민국의 대표 피로회복제, 박카스와 광동탕 ㅎㅎ

 

 

 

맛난 점심...

 

 

 

이리 산행길이 좋네요. ㅎㅎ 

 

 

 

 

 

 

 

 

잠시 쉴 틈에 잡혔네요. ㅎㅎ

 

 

 

 

 

 

구량천이 굽이굽이 돌며...

흡사 정선 백운산같네요.

 

한 회원님의 파노라마사진...고맙습니다.

 

 

 

 

 

내 스마폰으로는 두번찍는 수 밖에...

 

 

 

 

이쪽은 장수에서 흘러내리는 장수천...

 

 

멀리 마이산이 보인다.

 

 

 

 

 

포토존에서 한방!

 

 

진사님! 감사합니다~

 

 

 

신록의 색깔이 참으로 아름답도다!

 

 

이 섬이 죽도...

용담댐이 생기면서 이렇게 육지속의 섬이 생겼다네.

 

 

그리고 병풍바위...

돌아가는 물줄기를 폭파작업을 해서 이렇게 만들었다는데

이게 과연 잘한 짓인가? 

 

 

 

절개지에 상처를 받은 안타까움이 배여있는듯 하다.

 

 

잘려나간 병풍바위

다시는 이런 짓 하지말아야한다.

 

 

 

 

산행을 마치고 뒷풀이하는 곳에는 이렇게...ㅋㅋ

들어보기는 들어본 모양인데 ㅎㅎ

 

art is long lif is sort..zz  --> Art is long, (but) life is short.

 

 

 

그리고 또 하나 ㅋㅋ

 

 

실은 이말은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잡시(雜詩)에 나오는 말로 

원래 성년부중래 일일난재신(盛年不重來 一日難再晨)이라 해서

젊음은 일생 동안에 두 번 오지 않고 하루에 두 번 다시 아침이 되기 어렵다는 말로

세월과 시간을 아끼라는 뜻으로 씌어진 말이다.

 

 

 

학창시절 정여립의 난? 이렇게 배웠는데 그를 다시 생각하며...

 

천반산은 선조 22년(1589년)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 차별의 분수령을 이룬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주인공인 조선중기 사상가 정여립(1546~89)의 한(恨)이 서려 있는 곳이다. 정여립은 전주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15세에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정도로 영민하였고, 선조 3년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이라는 벼슬에 올랐으나 그의 스승인 성호 이이가 죽자 서인(西人)에서 동인(東人)으로 옮겨가면서 서인을 비판하게 되었고, 이것이 선조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된 까닭이었기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게 된다.

정여립의 이러한 변신은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사회에서 반역자적인 의미를 지니게 됨에 따라 부정적인 시각이 대세를 이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정여립은 모악산 앞 제비산에 머물면서 죽도(竹島)에 서실을 짓고 강론을 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며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다. 신분의 제약이 없는 이러한 조직은 급속도로 호남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이러한 영향은 1587년 손죽도를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던 중 1589년 10월,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 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그가 대동계 사병을 이끌고 도성으로 와서 선조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고 고변(告變)하였다. 선조는 이들의 세력이 막강함을 우려하여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관련자 80명이 압송되었으며 점차 범위가 확대되2년간 국문장이 열렸다. 옥사는 1천명의 희생자를 냈다. 당시 형문을 담당하던 위관은 송강 정철이었다 한다.
그런데 정여립의 죽음과 관련해 의견이 분분하게 나뉜다. 천반산에서 자살을 했던 것인지 단순히 죽도를 방문했다가 관군에게 잡혀 죽었던 것인지에 대해선 기록이 제각각이다. '동서만록'에 따르면 정여립은 평소에 천반산 아래 죽도를 자주 찾았기에 그를 죽도선생이라 불렀다고 하며, 더욱이 역적도 아니었기 때문에 죽도로 피난 간 것이 아니라 평소처럼 죽도의 비경을 즐기려고 나왔다가 관군에게 잡혀 억울하게 죽었을 뿐 자살로 조작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만을 남긴다고 했던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학창시절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공부하며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알던 정철!

송익필과 더불어 동서인을 가르고 남을 고문하던 모진 분이셨던가? ㅠㅠ 

 

그 당시 선비와 무고한 사람들을 1,000명넘게 죽였으니 민심이 흉융했고

조정 대신들은 동인 서인 당파싸움에 몰두하다보니 국력은 뿔뿔이 나뉘고  

몇년후 임진왜란에서 의심많았던 선조는 제 몸 피신하기에 바빴고

길잃은 백성들은 왜군에 처참히 밟혔을 것이다.

 

작금의 세월호 참사에 즈음하여 왜 이리 많이 오버랩되는가! 

이 빗속의 행렬...

저뿐아니라 대한민국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마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