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에세이 >
청주읍성 서문터
얼마 전 청주 서문오거리 주변을 걷다가 표지석 하나를 보았다. ‘청주읍성 서문터’라는 표지석이었다. 표지석에는 이 자리에 옛 청주읍성의 서문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왜적에게 빼앗겼던 청주읍성을 되찾기 위해 이 서문을 뚫고 진격하여 성을 되찾았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그 전쟁은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에서의 승전이라는 것이었다.
표지석을 읽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시 최신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고, 철저한 훈련을 거쳤을 정규군인 왜군을 상대하여 무기를 포함한 대부분의 장비도 매우 열세했을 의병들이 적들과 벌였을 전투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적의 총탄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숨져 갔으리라. 무엇이 그들을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게 했을까?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이었으리라. 어쩌면 성안에 갇혀 있을 피붙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적에게 온갖 능욕을 당하고 있을 누이와 아내와 어린 자식을 구하기 위해 총 대신 활을 들고, 그마저 없으면 농기구라도 들고 총과 대포를 향해 전진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랬구나! 우리 조상들이 이 땅을 지켜내기 위해 바로 이곳에서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치셨구나 싶었다. 표지석을 보고 그날의 상황을 생각하던 나에게 시 한 편이 다가왔다.
청주읍성 서문터
이 문을 통해 의병은 진격했다
표지석의 글자가 튀어 올라 성벽에 박힌다
그날 바로 오늘
깨질 듯 찢어질 듯
내 안 바닥에 가라앉았던
울컥울컥 올라와 부르르 떨게 하는 울림
주먹을 쥔다
돌을 움킨다
가자 저 벽을 뚫고 가자
우리를 부르는 소리
묶인 채 떨고 있는 딸아기의 신음소리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조총탄
펄펄 끓는 심장을 꺼내어
능욕으로부터 구해내고야 말
마침내 처음 성루에 걸릴 우리의 깃발
다시 찾을 맑은 고을 내 땅 청주여
- (하략)
- 졸시 〈성벽 위에 깃발 꽂고〉 부분
성 안과 밖에는 수많은 주검들이 나뒹글었을 것이다. 통곡과 아우성치는 소리, 매캐한 연기가 자욱했으리라. 그래도 의병들은 끝내 성을 되찾고, 성루에 우리의 깃발을 꽂고 만세를 불렀으리라. 우리의 용감한 의병들은 그렇게 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임란과 호란을 겪은 뒤 1651년, 당시 조정에서는 청주의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해미에 있던 충청도병마절도영이 청주로 옮겨와 군사업무를 주관하기에 이르렀다. 1710년 숙종 임금 대에 이르러는 의병장 조헌장군을 기리는 조헌장군기적비가 서문 밖에 서기도 하였다. 이후 우리는 1910년 근세에 이르러 나라를 송두리째 내주는 참화를 겪었다. 청주읍성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성돌은 하수구 공사에 씌여졌다고 전한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은 채 여전히 지극히 오만한 태도로 이웃을 대한다. 어찌할 것인가?
청주읍성 서문터
돌멩이를 움켜쥐고 던진다
던질 때마다 튕겨내는 왜곡으로 둘러싸인 유리성벽
던지고 또 던진다
반성을 모르는 오만을 건너
헐떡이는 정의를 구하기 위해
잘리고 또 잘리는 넝쿨이 될지언정
피투성이 손목으로
부러진 발목으로 기어오른다
감추고 속이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파렴치로부터
기어코 되찾아야 할 자존심
마침내 지켜내야 할 내 강토
읍성 서문
표지석에 내리쬐는 붉은 햇볕
- 졸시 〈성벽 위에 깃발 꽂고〉 부분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온갖 억지 주장을 강도 높게 펼치는 강대국이 바로 동해 건너에 있다. 우리는 과연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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