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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時習/문학동네

구인구색(九人九色)-청주고 48회 졸업생들이 출간한 50주년 기념 문집

by 박카쓰 2025. 9. 11.

고등학교 졸업 50주년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반백 년 동안 각자의 길 위에서 흩어졌다 다시 모인 인연의 힘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 하을호 기자 -시사저널 청풍
 

며칠 전, 현관문 앞에 붙어 있던 우체국 부재중 딱지 하나가 그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등기우편이라 하여 전화를 걸었더니, 곧바로 배달해 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내 손에 들어온, '졸업 50주년을 기념해 구인회 9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문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책은 매일 아침 마다 인사를 나누는 덕정 이정화 선생님께서 따뜻한 편지 한 장과 같이 들어 있었다.

 

책장을 펼치자마자, 나는 묘한 울림에 사로잡혔다. ‘구인구색(九人九色)’이라는 말처럼, 시와 수필, 기행문과 서예, 그리고 인생의 깊이를 담은 고백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들의 글은 단순히 문학적 창작물이 아니라, 반세기라는 시간을 견뎌온 영혼의 기록이었다.

책 표지는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 박해순 문인화가 작

 

박해순 회장은 발간사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지금도 모이면 꿈을 꾼다. 자꾸 쌓여가는 기억의 언덕에 누워 깊은 사유의 바람에 몸을 맡긴다. 비록 무상의 바람이지만…” 그 말 속에는 늙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젊은 날의 열망을 놓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아름다움이 담겨 있었다.

 

구인회의 아홉 사람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삶을 걸어왔다. 서예로 한 획을 남긴 이도 있고, 새벽마다 붓을 잡고 꽃과 글자를 피워내는 이도 있으며, 시와 수필로 내면을 열어젖힌 이도 있다. 문학박사와 경영학박사, 그리고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과 동행했던 교사까지. 직업과 길은 달랐지만, 다시 모였을 때 그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문학이라는 공통된 언어였다.

 

유영철 동문은 말한다. “좀 비틀거렸으면 어때. 좀 늦었으면 어때. 앞으로 더 잘하면 돼.” 그 담담한 문장은 어쩌면 삶을 가장 잘 압축한 고백일지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앞으로’라는 단어가 좁아지는 듯 보이지만, 그 좁은 길 위에서도 여전히 미래를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다는 사실. 그 믿음이 바로 이들의 문집을 가능하게 한 힘일 것이다.

 

또한 신청호 동문은 “이상은 높게, 사랑은 깊게, 술잔은 평등하게”라며 친구들에게 건네는 인사말 속에 삶의 균형을 담았다. 이상과 현실, 사랑과 우정, 술잔이라는 소박한 매개가 모두 어우러져 인생의 진리를 노래하고 있었다.

 

세월은 누구에게도 공평하다. 어느새 칠순을 넘어선 나이, 그러나 글 속에서는 여전히 스무 살 청춘의 웃음과 열정이 살아 숨쉰다. 이정화 동문은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고 고백했고, 홍종승 동문은 “이제 남은 길은 벗과 가족, 그리고 사회와 함께 더불어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들의 문장은 한 편의 시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기억을 붙잡는 일이며, 추억을 다시 살아 숨 쉬게 하는 일이다. 이들이 만든 문집은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니다. 그것은 반세기 동안 이어온 우정과, 세월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 정신의 증거다. 더구나 이 기록은 개인의 삶을 넘어, 한 세대를 살아낸 이들의 집단적 서사로서 후배들에게도 길잡이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받아 든 순간, 단순한 동문들의 기념 문집을 넘어선 울림을 느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나 지나온 길이자,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한 성찰이었다. 문학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살아온 날들을 성실히 기록한 모든 이들의 언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졸업 50주년, 반백 년의 우정이 빚어낸 문집. 그 안에서 나는 여전히 꿈꾸는 청춘들의 얼굴을 본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이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추억으로만 남기지 않고, 삶을 사랑하는 태도의 본보기로 새기는 일일 것이다. 문학이란 결국 삶을 노래하는 것이며, 삶은 언제나 문학이 될 수 있으니까.